지난 1월 17일, Twilight Time의 설립자 닉 레드먼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인격자로 명망 높았던 고인의 삶을 증명하듯 곳곳에서 애도와 함께 생전의 따사로운 추억을 회고하는 글들이 올라왔습니다. 저는 그와 사적으로 알고 지낸 적도 없고 포럼이나 SNS을 통해 말을 섞어본 적도 없지만, 훌륭한 유명인이 세상을 떠났을 때와는 다른, 조금 더 사적인 상실감을 느낍니다. 그는 제게도 한 DVD/Blu-ray 출시사의 설립자만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점점 극장 개봉작을 중심으로 한 동시대 한국 영화계를 멀리하게 되던 시절, 그렇다고 주변에 몇십 년 묵은 외국 영화의 DVD나 Blu-ray를 영어 자막으로 함께 보고 이야기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어떤 영화를 보아도 모든 감상이 침묵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 들던 시절, 그래서 영어 공포증을 안은 채 울며 겨자 먹기로 Blu-ray 음성해설이나 영어권 팟캐스트를 찾아 듣기 시작하던 시절, 닉 레드먼의 목소리는 큰 의지가 되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 오래된 영화를 결코 혼자서만 보고 있지 않다는 것, 저보다 앞서 이 영화를 좋아했고 Blu-ray로 출시해서 더 많은 사람과 만나도록 해주려 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리고 다시 그 Blu-ray를 보고 이야기를 새로이 나누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그런 사실들을 '세상에 사람이 그렇게 많은데 당연히 나 말고도 있겠거니'라고 짐작만 하는 것과 실제로 태평양 건너에서 동시대를 사는 사람의 육성을 통해 듣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언제나 차분하고 또박또박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자기주장에 앞서 다른 사람의 발언을 받고 끌어내는 데에 주력하는 레드먼의 대화 태도는 제게 큰 반성을 안겨주기도 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목소리도 좋았던 건 우주가 불공평함을 보여주는 사례인 걸까요, 아니면 그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목소리가 좋았던 걸까요?)


 또한 닉 레드먼은 Twilight Time 설립 이전에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 제작자로 훨씬 더 유명했습니다. 저도 한때는 영화 사운드트랙 앨범을 즐겨 모았지만 비용과 수납공간 때문에 어느 시점부터는 중단했고, 모으던 당시에도 음반 제작자 이름까지 눈여겨볼 정도로 업계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지요. 하지만 이번 소식을 계기로 그가 어떤 음반들을 제작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어마어마한 제목들이 주르륵 나왔는데, 그 가운데 [유령과 뮤어 부인(The Ghost and Mrs. Muir, 1947)] 사운드트랙 앨범이 있더군요. 제가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 1976)]보다도 더 자주 듣는 버나드 허먼 음반입니다. 고인을 기리고 떠나보내기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영화요, 음악이고요.

 그러므로 버나드 허먼의 음악을 들으면서, 이역만리에서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어린 영화 애호가를 위로하고 격려하고 반성하게 해주었던, 렉스 해리스가 연기한 입이 걸걸한 선장 유령보다는 진 티어니가 연기한 야무지고 독립심 강한 뮤어 부인을 닮았던, 닉 레드먼에게 깊은 감사와 애도를 표합니다.







 이 결산 글은 1월 초부터 쓰기 시작했고, 도중에 두 번 엎었고, 지금이 세 번째 버전인데 이것도 거의 한 달째 붙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난해진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를 갖다 붙일 수 있겠지만, 일이 바빴다느니, 어디를 다녀오느라 시간이 나지 않았다느니, 글이 안 써진다느니 하는 이유보다도 이 블로그의 수명이 다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어쩌면 이런 식의 연초 결산은 이번이 마지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기를 바라지만요. 2020년 초에 느닷없이 '올해는 안 해요' 하는 것보다는 미리 운을 띄워 두는 편이 좋겠다 싶어 여기에 밝혀 둡니다.

 지지부진함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기어이 글을 완성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출시사들에 대한 고마움과 격려를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한 업체를 제외하면 해당 출시사의 관계자들이 한국어로 쓴 이 글을 읽을 가능성은 희박하겠지만, 그래도 받은 즐거움이 많았기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지나치기에는 미안했습니다. 제목도 그런 마음에서 나왔습니다.

 종전과 마찬가지로 2017년 12월부터 2018년 11월 사이에 출시되었고, 2018년 1월부터 12월 사이에 손에 넣었고, 같은 기간 동안 최소한 본편은 다 본 타이틀만을 대상으로 했습니다. 그런 조건 때문에 가장 손해를 본 출시사는 Kino Lorber입니다. TV 시리즈 [The Outer Limits] 시즌 1시즌 2, 그리고 Pioneers: First Women Filmmakers가 모두 빠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이미 널리 사랑 받은 타이틀들이라 미안한 마음이 크지는 않습니다.

 고마움이라는 동기에 맞게 이번 결산에서는 영화도 영화지만 출시사 및 타이틀이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예를 들어 영화에 대한 만족도만 따지면 [99번 수감동의 혈투(Brawl in Cell Block 99, 2017)]나 [복수(Revenge, 2017)]는 반드시 들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둘 모두 성긴 부록이나 게으른 자막 처리가 불만족스러워 넣지 않았습니다. Kino Lorber는 여기에서도 조금 손해를 보았습니다. [서부의 네 얼굴(Four Faces West, 1948)]이나 [레트로액티브(Retroactive, 1997)]는 그렇다 쳐도 음성해설이 있는 [발데스가 온다(Valdez is Coming, 1971)][스페터스(Spetters, 1980)]는 넣었어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합니다만.

 처음에는 타이틀을 열여덟 개까지 꼽았다가 글을 고치면서 열세 개까지 줄였습니다. 지난 결산과 비교해 수가 대폭 줄어들었으나 딱히 의미 있는 변화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2018 (quasi-)Noirvember 때 이미 언급했기 때문에 김이 샌다는 사소한 이유만으로 넣지 않은 타이틀만 해도 여럿입니다. Kino Lorber는 여기에서도 손해를 보았습니다. [밤의 사냥꾼(The Night Stalker, 1972)][밤의 교살자(The Night Strangler, 1973)]는 하나로 묶어 순위에 올릴 만했습니다. [창 속의 여자(The Woman in the Window, 1944)]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렴 어때요. 이런 목록에 선정된다고 돈 나오는 것도 아니고. 순위도, 늘 그랬지만 이번엔 특히, 큰 의미는 없습니다. 한 7위 정도부터는 그냥 다 공동 1위로 봐도 될 것 같은데요.







13. 땐뽀걸즈 (플레인)


 [땐뽀걸즈(2017)]를 보는 동안 오래전에 읽은 영국의 다큐멘터리 감독/이론가 존 그리어슨의 글이 떠올랐습니다. 아직 다큐멘터리에 관한 인식이나 논의가 풍부하지 않았던 시절, 그리어슨은 외지의 풍물을 소개하는 기행 영화나 뉴스릴 등을 비판하고 로버트 플래허티 유의 작품을 찬양하면서 다큐멘터리는 현실을 질료로 삼되 단순한 기록에 안주하지 말고 질료를 배열, 재배열하여 창조적인 형태를 추구하여 예술적 가치를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9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너무 애매하고 순진하게 들리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땐뽀걸즈]에서 저를 사로잡은 것은 바로 그런 순진함이었습니다. 우리 곁에 있음에도 잘 모르거나 지나치기 쉬운 현실을 채집해 잘 모르는 사람도 이해할 수 있도록 알맞게 배열해 전달하고 싶다는 선의 말입니다. [땐뽀걸즈]는 공영 방송을 비롯한 한국 사회의 주류 서사 안에서 좀처럼 언급되지도 재현되지도 않거나 설령 재현되더라도 스테레오타입으로 소비되기에 십상이었던 삶의 모습을 예의 바르게, 기록자의 한계와 욕심을 솔직히 드러내면서 재구성합니다. 최근 몇 년 간 저는 한국의 주류 극영화가 암울한 사회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한다는 핑계로 센 척하느라 바쁜 나머지 다른 형태의 삶이나 더 나은 삶을 상상할 의지와 능력을 잃어버렸다며 낙담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삶을 허구로라도 만들어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곤 했던 저 자신 역시 편견에 빠져 있었습니다. 거제여자상업고등학교 댄스 스포츠 반 선생님과 학생들은 제가 한국 영화나 TV나 그밖의 다른 서사 매체에서 과연 본 적이 있기나 한가 의문이 들 만큼 건강하고 수평적인 사람들이었고, [땐뽀걸즈]라는 영화를 만든 사람들 또한 그러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공의 인물이 아니라 버젓이 같은 시대 같은 사회를 사는 사람들임을 확인하는 내내 놀랐고 안도했고 뜨끔했지요.

 [땐뽀걸즈]는 TV 방영과 극장 개봉을 통해 좋은 평가를 받았지만, Blu-ray로 출시할 만큼 상업성을 보장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플레인에서는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한정판 DVD를 제작한 뒤 OST를 제외한 한정판을 150장 한정으로 다시 제작해 인터넷 서점을 통해 판매했으나 지금은 그마저도 품절됐습니다. 나중에 아웃케이스가 없는 일반판을 다시 제작할 계획은 있다고 합니다. 참고로 출판사 곰프레스에서 펴낸 이승문 감독의 [땐뽀걸즈] 제작기 [쓸데없이 찬란한]도 영화만큼 훌륭하다는 점을 언급해 두렵니다. 이 책 역시 DVD처럼 크라우드펀딩을 통해 출간된 뒤 잔여 수량을 예스24 독점으로 판매하다 마찬가지로 지금은 품절됐습니다. 아직 재출간 계획도 없다고 하는데, 나중에라도 더 많은 독자와 만날 기회가 있기를 기원합니다.

 2018년에 플레인은 Blu-ray 외에도 DVD, 시나리오, 사진집, 사운드트랙 CD와 LP 등을 선보이며 제품군을 다양화했습니다. 이런 변화는 한 영화를 다양한 방식으로 소장하고 싶어 하는 팬들의 욕구를 겨냥한 것일 테지만, 그만큼 Blu-ray 시장만으로는 회사 운영이 어렵다는 의미로도 읽힙니다. 체감상 출시한 Blu-ray 종수는 전보다 줄어든 듯하며, 그나마도 [썸머 워즈(サマーウォーズ, 2009)], [캐롤(Carol, 2015)], [부산행(2016)]처럼 기존에 직접 출시했거나 다른 출시사를 통해 나왔던 작품을 다시 선보인 사례도 있어 새로 소개한 영화의 수는 그보다 더 적습니다. [땐뽀걸즈]처럼 Blu-ray로는 수익을 내기 어려울 작품을 DVD로만 출시하는 경우도 늘었습니다. Blu-ray로 나왔더라면 당장 구매했을 [20세기 여자들(20th Century Women, 2016)]과 [토니 에드만(Toni Erdmann, 2016)]이 DVD로만 나오는 바람에 얼마나 낙담했던지. 한국의 영화 소비 방식을 고려하면 앞으로도 이런 경향이 쉽게 바뀌지는 않을 듯해 더더욱 걱정스럽습니다. 조금 더 밝은 이야기를 하자면, 그런 와중에도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별반 눈길을 끌지 못했던 [로건 럭키(Logan Lucky, 2017)]를 Blu-ray로 출시한 건 놀랍고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직접 출시한 제품은 아니지만 플레인에서 제작을 대행한 [아가씨(2017)] Blu-ray의 스틸북 디자인에는 감탄을 금치 못했고요. 2019년에는 [독전(毒戰, 2013)]을 특히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디 광동어, 북경어를 바탕으로 번역한 우수한 한국어 자막을 달고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현재 준비 중이라는 [피의 연대기(2017)]도 극장에서 봤는데 좋았습니다. 교육용 자료로도 널리 판매되길 기원합니다. 그런데 이제는 모두가 잊은 듯한 [이민자(The Immigrant, 2013)]는 정말로 출시될 수 있는 걸까요? 아니면 그만 포기하고 Starz/Anchor Bay에서 출시한 Blu-ray를 사야 하는 걸까요?

 글이 늦어지는 사이 플레인에서는 [20세기 여자들], [토니 에드만], [사울의 아들(Son of Saul, 2015)], [매기의 계획(Maggie's Plan, 2015)] DVD 판매량이 목표치를 초과하여 Blu-ray 추가 발매를 확정했다고 밝혔습니다. 더없이 기쁜 일입니다. [20세기 여자들]에 "우리들의 20세기"말고 "20세기 여자들"이라는 제목을 사용한 슬리브 커버도 넣어 달라고 (혹은 양면 슬리브 커버를 제작해 선택의 여지를 달라고) 건의해 봐야겠군요. 그리고 부디 [재키(Jackie, 2016)]도!







12. City Hunter (Eureka)


 Eureka가 2017년에 The Masters of Cinema Series로 [취권(醉拳, 1978)]을 출시해 재미를 보더니 2018년에는 Eureka Classics 시리즈를 통해 본격적으로 홍콩 액션 영화 출시에 나섰습니다. MoC의 입지가 줄어드는 걸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습니다만, 그와는 별개로 홍콩 액션 영화 팬들이 재미를 볼 때도 됐지요. 다만 8, 90년대 대표작들의 상당수가, 보존 미흡과 복원 불량이라는 이중고 속에 이상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출시될 수밖에 없어 유감입니다. 그나마 Eureka는 나름대로 존중할 만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 사태 이후 홍콩 영화 팬들에게 직접 도움을 구해서 포춘스타에서 제공하지 않은 음향 소스를 찾아 수록하고 영어 자막 번역을 개선하려 노력한 건 분명 칭찬할 만합니다. 특히 저는 번역 시도들이 재미있었습니다. 물론 더 많은 돈을 들여서 진짜 언어 전문가를 초빙해 번역을 맡기는 게 이상적입니다. 하지만 출시사들이 자막 번역에 할애하는 예산이 넉넉할 리는 없을 테니까요. 게다가 저 또한 사적인 욕심으로 취미 삼아 번역을 시작했고, 아직도 가끔은 척박한 번역 환경 탓에 제대로 된 번역가를 만나지 못한 불운한 작품을 상대하며 중역에 나서곤 하는 처지인지라, 오랜 홍콩 영화 팬들이 포럼에서 번역에 관해 왈가왈부하고 도움을 청하고 오류를 지적하는 광경이 퍽 반가웠습니다(평소 번역 품질은 물론이고 영어 자막에 관한 이야기조차 꺼내지 않던 영어권 소비자들이 번역을 두고 고심하는 모습에 뒤틀린 기쁨을 느끼기도 했음을 고백합니다).

 [시티헌터(城市獵人, 1993)]는 2018년에 Eureka에서 출시한 홍콩 액션 영화 중 가장 평가가 좋지 않은 작품일 겁니다. 플롯은 있는 시늉만 하는 정도입니다. 리듬은 엉망진창입니다. 성룡 중심의 액션 장면도 많지 않습니다. 그나마 있는 액션 장면들은 아슬아슬하고 위험천만하다는 기분 없이 장난기만 가득합니다. 중간에 뜬금없이 나오는 스트리트 파이터 장면은 사상 최고의 스트리트 파이터 실사화라는 명성을 누리고 있지만, 그것도 반쯤은 농담에 가까운 명성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Eureka Classics로 출시된 홍콩 액션 영화 중 디지털 복원과 Blu-ray라는 매체의 덕을 가장 많이 본 작품이라면 단연 [시티헌터]를 꼽겠습니다. [폴리스 스토리] 시리즈나 [프로젝트 A] 시리즈, [황비홍] 시리즈, [철마류(少年黃飛鴻之 鐵馬騮, 1993)] 등은 화면비만 멀쩡하면 VHS로도 그 진가를 확인할 수 있을 영화들입니다. 4K 복원한 고화질로 보니 좋기야 하지만 '이게 이런 영화였나?!' 수준의 경천동지할 재발견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성룡, 이연걸, 견자단의 몸놀림은 화질이 떨어진다고 느려지거나 투박해지지 않으니까요. 반면 Eureka에서 내놓은 [시티헌터] 복원판에서 가장 먼저 눈길을 사로잡는 것은 마리오 바바나 다리오 아르젠토에 뒤지지 않는 강렬한 원색의 향연입니다. 비현실적인 색채가 영화 전반의 헐렁하고 장난스럽고 소란스러운 태도를 힘껏 뒷받치면서 슬랩스틱 단편 모음 같은 분위기를 조성하자, 예전에는 빈곤한 연출력의 증거로만 보였던 엉성한 리듬마저 어느 정도 용서가 됩니다. 이런 유쾌한 산만함 속에서라면 성룡이 홀로 앞장 서서 극을 짊어지고 활약하지 않더라도 상관없습니다. 사실 왕조현, 구숙정, 고토 후미코가 지금보다 더욱 날뛰게 했더라면 훨씬 더 매력적인 엉망진창이 되었을 거예요.







11. Hardware (Ronin Flix)


 [하드웨어(Hardware, 1990)] Blu-ray를 구매한 이후 두 번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원룸형 아파트 안에서 살인 로봇이 폭주하는 슬래셔로 보았고, 다음에는 디스토피아 미래 사회를 다룬 SF로 보았지요. 두 번 모두 즐거웠습니다. 슬래셔로서는 '대충 이런 식으로 끝나는군. 아쉽기는 하지만 나름 괜찮았어.'라고 건방진 생각을 품을 즈음 갑자기 기어를 바꿔 넣고 몇 번씩 다시 돌진해 오면서 무기력한 여성 희생자, 남성 구원자, 쓸모없는 코믹 릴리프 등의 스테레오타입을 교란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SF로서의 미덕이 더 기억에 남습니다. 처음에는 한정된 공간을 무대로 한 저예산 영화라고만 여겼는데 다시 보니 세계 묘사에 들인 공이 상당하더라고요. [하드웨어]의 세계는 보기에는 근사하지만 세상 돌아가는 원리나 일반인들의 일상사를 짐작하기는 어려운 배경막도 아니고, 반대로 지나치게 현실과 가까운 거울상도 아닙니다. 눈앞의 현실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조금씩 나빠지는 세상을 수수방관하다 보면 언젠가는 정말로 도래하고야 말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있을 정도의, 지나치게 멀지도 가깝지도 않고 적당한 거리에서 실감을 지니고 육박해 오는 미래죠. 해수면이 몇 센티미터씩 상승하고, 미세먼지 많은 날이 며칠씩 늘어나고, 정부는 해괴한 정책으로 개인의 권리를 조금씩 갉아먹고, 그럴 때마다 매번 눈살을 찌푸리기는 하지만, 하루하루 살기 바쁜 무력한 일개 시민으로서 뭘 어찌하랴 싶어 그냥 못 본 척하고. 그렇게 체념과 타협을 거듭하다 보면 디스토피아 SF 소설에서나 나오는 과격하고 허황한 상상으로만 간주했던 풍경이 어느 순간 일상이 되어 있겠죠. 바로 그런 우울한 비전이 스쳐 지나가는 대화의 편린이나 풍경, 소도구 따위에서 끊임없이 배어 나와 촉각을 자극합니다. 그 안에서 살인 로봇의 폭주는 단순한 장르적 해프닝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나빠지던 세상이 어떤 임계점을 돌파했음을 통보하는 묵시적 신호처럼 보이고요. 첫인상은 조그맣고 단단해 보이는데 속을 들여다 보면 상당히 커다란 이야기가 꿀렁이고 있어요. 이런 SF 영화 흔치 않습니다.

 Ronin Flix는 Code Red와 Scorpion Releasing에서 출시한 타이틀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소매 사이트입니다. 두 출시사는 예전부터 타이틀마다 유통 경로를 달리하는 정책을 펴 구매자들에게 혼란을 안겼는데, 왜 그러는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Ronin Flix는 그 두 출시사의 타이틀을 취급하는 여러 판매처 중 가장 운영이 깔끔합니다. 2018년에는 Scorpion Releasing에서 야심 차게 준비한 한정판들이 이곳에서만 판매되면서 인지도가 더 높아졌고요. 그러던 어느 날 Ronin Flix에서 느닷없이 [하드웨어] Blu-ray를 출시하겠다고 발표했습니다. 이미 2009년에 Severin Films에서 우수한 Blu-ray를 출시한 바 있기에 (오리지널 네거티브 필름을 새로 4K 스캔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새삼 호들갑을 떨 소식은 아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부록은 새로 넣은 리처드 스탠리 인터뷰 하나를 제외하면 전부 Severin Films판에서 가져왔고요. 그러나 Ronin Flix의 Blu-ray는 신생 출시사의 첫 타이틀답지 않은 안정적인 만듦새로 큰 만족을 안겨주었습니다.

 안정적인 만듦새란 무엇인가. 별거 아닙니다. 우선 새로 디자인한 커버가 단정하면서도 영화의 인상을 잘 전달해서 오리지널 포스터나 Severin FIlms판 커버보다 더 마음에 듭니다. 슬립 커버와 슬리브 커버에 동일한 이미지를 사용하되 살짝 변화를 주어 지루하지 않게 한 꼼꼼함도 돋보입니다. 섣불리 소책자나 스틸 사진, 사운드트랙 CD, 렌티큘러 케이스나 스틸북 케이스 등에 힘을 주지 않은 것도 마음에 듭니다. 점점 그런 패키지 구성이 업계 표준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만, 구성물이 많으면 위험도 커지는 법입니다. 케이스가 두꺼워지면 수납공간을 필요 이상으로 잡아먹죠. 소책자에 수록한 글의 내용이 부실하거나 스틸 사진의 해상도가 낮거나 CD의 녹음이나 음질에 문제가 생긴다거나 케이스 제작이 불량하거나 하면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 하고요. Ronin Flix는 섣불리 제작비를 많이 들이기보다는 기본에 충실했습니다. 지나치게 잘 휘거나 깨지는 싸구려 케이스를 쓰지 않았고, 슬리브 커버를 질 낮은 종이에 대충 단면 인쇄하지 않았고, 슬립 커버를 너무 헐렁하거나 빡빡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본편의 화질과 음질은 흠잡을 데 없고, 부록은 사실 Severin Films판 부록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자체 제작한 리처드 스탠리 인터뷰의 경우, 슬리브 커버 뒷면의 사양에 "NEW"를 붙여서 기존 판본과의 차이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영어 자막. 처음 Ronin Flix에서 타이틀 출시를 발표했을 때 영어 자막이 있느냐고 문의했더니 지체없이 있다고 답하더군요. 다년간 미국 DVD/Blu-ray를 수집한 경험으로 볼 때 미국 시장만을 상대하는 신생 영세 업체가 처음부터 영어 자막에 신경을 쓰는 게 흔한 일은 아닙니다(Severin Films판에는 영어 자막이 없었습니다). 자막을 직접 보고 나서는 더욱 감동했습니다. 글자체와 크기와 싱크에 신경을 쓴 무척 성실한 자막이었거든요. 전부 사소한 장점인가요? 하지만 저는 최근 몇 년 간 여러 출시사들이 점점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 제작비를 줄이려 한다는 인상을 받아 왔습니다. Kino Lorber도, Shout! Factory도, Warner Archive Collection도, 심지어 때로는 Criterion과 Eureka도요. 그런 와중에 전문 출시사도 아니었던 신생 업체가 이렇게 기본에 충실한 타이틀을 내놓았으니 박수를 받아 마땅합니다. (아, Ronin Flix는 쇼핑몰이기도 하니까, 2018년에 이곳에서 구매한 모든 타이틀이 매우 빠르게, 손상 없이 배송됐다는 점도 말해두겠습니다.)

 그렇다고 Ronin Flix가 앞으로 Blu-ray 제작에 주력할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보다는 판매를 본업으로 하되 틈틈이 여유가 생기면 제작도 한다는 정도겠지요. 그래도 실력이 아까우니 1년에 한 타이틀이라도 내주기를 바랍니다. 리처드 스탠리의 두 번째 장편 극영화 [더스트 데블(Dust Devil, 1992)]은 2015년에 Severin Films에서 Blu-ray 출시를 준비하다가 라이센스 문제로 진행이 중단됐는데, Ronin Flix에서 배턴을 이어받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겠습니다.

 한편 [모로 박사의 섬(The Island of Dr. Moreau, 1996)] 대재난 이후 장편 극영화를 만들지 못하고 있던 리처드 스탠리는 드디어 니콜라스 케이지를 주연으로 H. P. 러브크래프트의 "우주에서 온 색채"를 영화화 할 모양이던데, 행운을 빕니다.







10. The Man Who Cheated Himself (Film Noir Foundation / Flicker Alley)


 [자신을 속인 남자(The Man Who Cheated Himself, 1950)]는 경천동지할 만한 숨은 걸작 필름 누아르는 아닙니다. 장르 관습을 능숙하게 답습하되 약간의 개성도 갖춘 모범적인 고전기 할리우드 필름 누아르죠. 범죄를 감추려 애쓰는 베테랑 형사의 이야기는 익숙한 경로를 따라 날렵하게 전개되고, 세 주연 배우 리 J. 콥과 존 달과 제인 와이먼이 모두 자신의 이미지와 맞지 않는 배역을 연기하는 모습이 생경한 재미를 더해주며, 매우 촉박한 제작 기간 속에서도 멋들어지게 담아낸 샌프란시스코의 정경이 볼 만합니다. 필름 누아르 정전/걸작 목록에서도 이 영화를 찾아보기는 어렵겠지만, 이런 영화들이야말로 스튜디오 시스템과 장르의 세계를 지탱하는 척추인 법입니다. (결국 '거장'들의 '걸작' 목록만을 추어올릴 뿐이라면 장르적 접근이 무슨 필요일까요? 장르란 본디 진부하고 열등한 것인데 위대한 감독들에게는 예외가 나온다고 말하기 위해서?)

 필름 누아르 재단은 제법 만족스러운 영화를 무척 만족스러운 Blu-ray로 가꾸어 냈습니다. 아, Flicker Alley에서 Blu-ray/DVD를 생산해 배급하고는 있지만, 필름 누아르 재단에서 전체 프로젝트를 주도하고 부가 영상과 소책자 내용물을 준비했으니 필름 누아르 재단 타이틀이라고 할게요. 블루키노에서 생산하고 배급하는 한국영상자료원 Blu-ray들의 실질적인 제작 주체가 한국영상자료원인 것과 유사합니다. 부가 영상이라고 해봐야 22분짜리 전문가 인터뷰 중심 다큐멘터리와 7분짜리 로케이션 비교 영상뿐이고, 소책자도 리뷰 하나 없이 사진 중심이니 일견 단출해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필름 누아르 재단 설립자 에디 멀러의 흥행사 기질이 듬뿍 배어있습니다. 길지도 짧지도 않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길이의 다큐멘터리로 고전기 할리우드의 열성적인 애호가가 아니라면 잘 모를 만한 정보들을 알기 쉽게 전달해서 영화의 세세한 부분에까지 감상자의 눈길이 미치도록 유도하여 풍미를 한껏 돋구고, 그렇게 생겨난 관심이 이 영화에서 끝나지 않고 다른 영화들로까지 번지도록 이끄는 솜씨는 과연 일생을 필름 누아르에 바친 베테랑 호객꾼(이 설립한 단체)답습니다. DVD/Blu-ray의 부가 영상을 익숙히 보아온 사람들이라면 이런 길이와 형식의 영상이 이 정도의 밀도와 전달력을 갖춘다는 게 쉽지 않음을 알 겁니다. 로케이션 비교 영상이나 소책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화 속 장면과 해당 촬영지의 현재 모습을 비교한다거나, 영화 관련 스틸 사진 및 신문 기사를 싣는 것쯤은 흔히들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필름 누아르 재단은 조금 더 꼼꼼합니다. 보면 보고 말면 말라는 식으로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어요. 이 자료에서 어떤 점을 눈여겨보면 좋을지 늘 정확하게 짚어 주면서 더 큰 호기심을 불러일으킵니다. 소책자에 제작 및 개봉 당시 신문 기사 스크랩이 실려 있으면 그 기사 내용까지 다 읽어 보게 된다니까요. 오늘날 수많은 출시사가 부록을 꽉꽉 채운 Blu-ray를 출시합니다만, 솔직히 그중에는 그저 부록의 가짓수가 많다는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끌어다 모아 넣은 부록도 많습니다. 업계에서 잘 나가는 유명 필자가 만든 비디오 에세이라고 해도 '고작 이런 내용을 이렇게 길게 부풀려서 이렇게 무성의하게 영상과 섞다니' 싶은 경우가 드물지 않죠. [자신을 속인 남자] Blu-ray는 그렇게 타성에 젖어 만든 타이틀, 그리고 부록의 가짓수만으로 타이틀의 가치를 섣불리 판단하는 소비자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모범적인 타이틀입니다.

 필름 누아르 재단에서는 계속해서 Flicker Alley와 함께 [Repeat Performance(1947)], [Trapped(1949)], 그리고 아르헨티나 필름 누아르 [Los Tallos Amargos(1956)] Blu-ray를 출시할 계획이라고 합니다. 필름 누아르 재단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합니다.







9. Sudden Fury (Vinegar Syndrome)


 2012년에 라이언 에머슨과 조 루빈이 설립한 Vinegar Syndrome은 주로 60년대에서 80년대 사이에 제작된 미국 저예산 장르 영화 및 극장용 포르노 영화를 복원해 출시합니다. 처음에는 포르노 쪽의 비중이 컸지만 이후 꾸준히 공포 영화의 지분이 늘어나면서 점차 포르노에는 관심이 없는 수집가들에게서도 호응을 얻더니 이제는 물리 매체 수집가들의 연말연시 결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업체로 거듭났지요. Vinegar Syndrome에서 출시하는 장르 영화들은 거칠게 말하자면 Arrow Video나 Shout! Factory에서 손대는 영화들보다는 두세 등급 아래에 위치한, 몹시 허름하고 자주 저열하며 종종 기상천외하고 대개는 듣도 보도 못한 저예산 영화들입니다만, 이런 영화들을 보지 않고는 못 배기는 악착같은 장르 애호가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Vinegar Syndrome은 그런 악착같은 애호가/수집가들의 심리를 너무나도 잘 헤아리는 기업입니다.

 Vinegar Syndrome의 우수한 점은 크게 다음과 같습니다.

 ① 웬만하면 오리지널 카메라 네거티브 필름을 스캔하고 복원해 늘 일정 수준 이상의 화질과 음질을 보장합니다. Criterion, Arrow Films, Eureka, BFI, Powerhouse Films 같은 업계 최상단에 있는 업체들도 1년에 한두 번 이상은 품질 문제가 불거지는데, Vinegar Syndrome 타이틀의 복원 품질이 구설에 오르는 모습은 정말 보기 어렵습니다. 실제로 복원 품질이 준수할 뿐만 아니라 출시작 대다수가 이전까지는 필름으로든 VHS로든 처참한 화질로만 접할 수 있었을 비주류 저예산 영화들이라서 '아니 뭘 이따위 영화를 이렇게 끝내주게 복원을 하는겨?!' 라는 신음이 나왔으면 나왔지 시비가 생길 여지가 거의 없죠.

 ② 커버 디자인과 예고편 제작 실력이 끝내줍니다. 한 해 동안 나온 가장 우수한 커버 디자인을 하나만 꼽는다면 Criterion이나 Arrow Films 타이틀 중에서 꼽을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커버 디자인 솜씨의 평균을 따진다면 Vinegar Syndrome을 능가할 출시사가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전까지 제목조차 들어본 적도 없는 영화인데 순전히 커버 디자인을 보고 '저건 뭐여?' 싶어서 관심을 두게 된 경우가 한둘이 아닙니다. 예고편도 마찬가지. 거의 모든 타이틀의 예고편을 직접 새로 편집해서 유튜브에 올리는 정성도 존경스러울뿐더러 영화의 액기스를 뽑아 전달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딱히 실제보다 더 재미있고 신나는 영화인 척 약을 파는 것도 아니라서 구매를 결정하는 데에도 큰 도움이 돼요.

 ③ 한정판 재고 관리 및 할인 정책이 명쾌하고 매력적입니다. Arrow Films는 정말 훌륭한 출시사지만 초회 한정판 정책은 늘 심기를 불편하게 합니다. 출시 직후 구매를 촉진하고 제작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슬립 커버나 소책자를 초판에만 제공하는 정책 말입니다. 소비자로서는 초판을 얼마나 찍었는지, 어디에 얼마나 남아있는지 알 길이 묘연하죠. 영어권 포럼의 관련 스레드에는 틈만 나면 '요즘 아마존에서 주문해도 소책자 들어 있어요?'라는 질문이 올라옵니다. 똑같은 돈을 냈는데 한두 달 늦게 샀다고 구성물이 빠져 있으면 신경이 쓰이지 않겠습니까? 그런 스트레스를 볼모로 삼아 빠른 구매를 권장하려는 의도가 괘씸하다 이겁니다. 점점 많은 출시사들이 이런 정책을 따라 하고 있는데, 심지어 Lionsgate의 Vestron Video Collector's Series 같은 경우 슬립 커버 관리를 제대로 못 해서 출시 직후 구매했는데도 슬립 커버가 없었다며 불만이 제기되는 모습도 여러 번 보았습니다. (참고로 최근에는 BFI도 2019년 봄 출시작부터 초판에만 소책자를 수록하겠다고 공지했습니다. 젠장.) 그런가 하면 무작위로 찾아오는 할인 행사가 소비자들에게 기쁨만큼이나 큰 고통을 안겨주기도 한다는 건 수집가들이라면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일 겁니다. Vinegar Syndrome은 이런 문제들을 비교적 깔끔하게 처리하고 있습니다. 우선 슬립 커버 한정판은 (DiabolikDVD나 Grindhouse Video Tampa 같은 극소수 독립 소매점에 제공하는 물량을 제외하면) 자사 웹사이트에서만 판매합니다. 재고가 일정 한도 이하로 줄면 남은 수량을 한 자릿수까지 정확하게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하고요. 정규 할인 행사는 1년에 정확히 두 번, 5월 말에 있는 '블랙 프라이데이까지 앞으로 반년' 할인 행사와 11월 말에 있는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 행사뿐입니다. 행사 중에는 새 깜짝 타이틀도 둘씩 공개합니다. 깜짝 타이틀의 정체를 공개하지 않은 시점에서 미리 더 저렴하게 구매할 기회까지 줍니다. (짐작컨대) Mondo Digital과 Rock! Shock! Pop!에 미리 깜짝 타이틀의 리뷰용 디스크를 제공해 행사가 시작되면 곧장 리뷰가 올라오도록 해서 구매에 참고할 수 있도록 하고요. 이런 깜짝 타이틀들은 행사 기간에 불티나게 팔리며, 재고가 완전히 소진되는 일도 잦습니다. 재고를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마음이 급해져 사게 되기도 하죠. 그러다 보면 다른 타이틀도 얹어서 사게 되고요. 아울러 블랙 프라이데이 행사 중에는 향후 1년 동안 Vinegar Syndrome에서 출시할 모든 타이틀을 미리 더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연간 패키지 상품도 소량 판매합니다. 미국인들도 한국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본 적 없는 영화의 타이틀은 구매를 망설이는 경우가 잦습니다. 그런데 Vinegar Syndrome은 앞으로 어떤 타이틀을 출시할 계획인지 전혀 밝히지 않은 상황에서 1년 치 타이틀을 미리 판매하는 상품을 내걸며, 그게 실제로 매진된다는 얘깁니다. Vinegar Syndrome이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했음을 증명하는 예라 하겠습니다.

 그 밖에 주문 배송 관련 정책도 명료하며(할인 행사 도중에 추가 주문해서 기존 주문과 합치고 싶다, 이런 것도 다 주문 옵션에 있습니다), 최근 몇 년간은 영어 자막도 열심히 넣어 줍니다. 영어 자막의 싱크는 개선의 여지가 많습니다만, 그래도 한 영화의 두 버전을 수록했을 때 두 버전에 각각 영어 자막을 제공하는 등의 꼼꼼함은 흐뭇합니다. 자막을 전혀 넣지 않던 초창기와 비교하면 많이 발전했어요.

 다시 출시작 이야기로 돌아가서, 최근 Vinegar Syndrome은 이따금 Vinegar Syndrome스럽지 않은 영화도 선보이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도 복원되지 않았던 저예산 영화임은 마찬가지지만 좀 더 문화적 파급력이 있었거나 착취성이 덜하고 품위가 있는 영화들, 예컨대 [리퀴드 스카이(Liquid Sky, 1982)]나 [버디(Buddies, 1985)] 같은 영화요. 나오자마자 Vinegar Syndrome 사상 최고의 출시작이라는 격찬까지 들었던 [격분(Sudden Fury, 1875)]도 마찬가지입니다. 조금 괜찮은 스릴러만 나왔다 하면 무조건 갖다 붙이는 "히치콕 풍(Hitchcockian)"이라는 표현은 바로 이런 영화에 쓰여야 합니다. 처음 본 여자가 남편에게 살해당하지 않도록 막으려다 거꾸로 누명을 쓸 위기에 처한 남자. 그리고 외딴곳에서 우연히 일어난 사고 덕분에 부인을 죽이고 다른 남자에게 누명을 씌울 기회를 맞이한 남자. 둘 중 누구도 상황을 완전하게 통제하지 못한 채 일단 눈앞의 곤경에서 빠져나가려 애쓰는 임기응변의 연속. 실로 히치콕의 악몽 속에서 튀어나온 듯한 이야기입니다. 더 말은 필요 없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야 아마존과 Blu-ray.com에는 [격분]의 정식 출시일이 2018년 12월 11일로 기재됐음을 깨달았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타이틀을 11월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 기간에 주문했고 주문 시점에서 이미 재고가 있는 상품이었기 때문에 11월 출시작으로 간주하겠습니다.)







8. The Last Seduction (Scorpion Releasing)


 2018년의 기량 발전상은 Scorpion Releasing에 수여하고 싶습니다. DVD 시절부터 업계에서 활약한 월터 올슨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이 출시사는 Vinegar Syndrome과 마찬가지로 다른 곳에서는 눈독 들이지 않는 듣도 보도 못한 (주로 장르) 영화들을 소개해 왔습니다만, 그동안은 영어 자막을 제공하지 않는 방침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2018년을 기점으로 Scorpion Releasing에서는 꽤 성실하게 영어 자막을 넣기 시작했고, 동시에 수집가용 한정판 시장에 발을 들이면서 타이틀의 품질도 좀 더 높여 가는 추세입니다. 그중에서도 Ronin Flix를 통해 판매한 한정판 [그리즐리(Grizzly, 1976)], [베네치아의 지알로(Giallo a Venezia, 1979)], [죽음의 배(Death Ship, 1980)], [공포의 여대생 기숙사(The House on Sorority Row, 1982)], [머더 록(Murder Rock, 1984)], [교회(La chiesa, 1989)], [종파(La Setta, 1991)]는 공포 영화 팬들의 큰 환영을 받았지요. 2019년 기대작 중 하나인 [오페라(Opera, 1987)]의 경우 2018년 1월에 (이탈리아어 음성과 영어 자막은 없는) 일반판을 먼저 내놓았는데, 일부 장면에서 화면 떨림이 있다는 불평이 나오자─낡은 필름을 스캔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로 보이며 넘어가려면 넘어갈 수도 있는 정도입니다만─한정판 출시를 미루고 추가로 수정 작업을 하겠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만, 정작 제가 가장 열광했던 타이틀은 아마도 2018년 Scorpion Releasing 출시작 중 가장 품질이 좋지 않을 [마지막 유혹(The Last Seduction, 1994)]이었습니다. 품질 얘기부터 하고 넘어가죠. 영국 ITV에서 제공한 이 영화의 HD 마스터는 오래전에 만들어졌습니다. 이미 2015년에 영국 Network에서 이 마스터를 이용해 Blu-ray를 출시한 바 있는데, 디지털 노이즈가 들끓고 깍두기 현상까지 발생하는 처참한 몰골로 소비자들을 경악케 했지요. 오랫동안 이 영화를 보고 싶었던 저도 스크린샷을 보는 순간 단숨에 구매 의욕을 잃을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Scorpion Releasing 역시 다른 대안을 찾지 못해 ITV 마스터를 사용했습니다(이 사실을 출시 전에 미리 고지했습니다). 그나마 한계가 뚜렷한 소스를 나름대로 열심히 매만진 끝에 Network판보다는 결과물이 한결 낫습니다. Blu-ray로서는 여전히 함량 미달일 테지만 중상급 DVD 정도는 됩니다. DVD로 영화를 보는 데에 익숙한 제게 문제가 될 정도는 아니었어요. 일단 영화에 빠져들면 화질은 별로 신경 쓰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 얼마나 빠져들기 좋은 영화란 말입니까. 뛰어난 네오 누아르나 팜므파탈을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언급되는 작품이 이 [마지막 유혹]인데요, 직접 보고 나니 오히려 명성이 부족하다 싶었습니다. [마지막 유혹]의 빼어남은 어디에서 오는가. 답은 무척 간단합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팜므파탈의 시선으로 진행되는 훌륭한 필름 누아르가 몇이나 있습니까? 팜므파탈이 도중에 개과천선하거나, 여린 모습을 드러내거나, 체포나 죽음을 통해 처벌받지 않고 끝까지 악독하게 굴며 성공하는 필름 누아르는요? (참고로 저는 팜므파탈이라는 스테레오 타입을 싫어합니다. 정확히는 그런 인물형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필름 누아르에 나오는 강단 있고 약은 여자에게 무조건 팜므파탈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보는 게으른 관행이 싫어요. 하지만 [마지막 유혹]은 그 스테레오 타입을 고스란히 받아들인 채 만든 영화니까 넘어가겠습니다.) 저어엉말 없습니다. 시대가 변했다고 하지만 이건 정말 안 변하는 것 같아요. 당장 2018년에 나온 [부탁 하나만 들어줘(A Simple Favor)]도 이 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장르 공식을 갖고 논 워쇼스키 자매의 [묶였다(Bound, 1996)]는 빛나는 예외입니다만, 그 영화가 관습을 전복한 방식은 좀 더 복잡하지요. [마지막 유혹]의 방식은 오히려 간단하기에 정말 보기 드뭅니다. 자, 커플 A(男)와 B(女)가 있습니다. B는 A를 속이고 돈을 혼자 차지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옆에 있는 순진한 C(男)를 유혹해 A를 없애버리려 합니다. 지긋지긋하게 많이 본 이야기 아닙니까? 대다수 필름 누아르는 이 구도에서 순진한 남자 C를 주인공으로 삼습니다. (연습 문제: [묶였다]와 [부탁 하나만 들어줘]가 이 구도를 어떻게 변용했는지 돌아봅시다.) [마지막 유혹]이 한 일은 실로 간단합니다. B가 주인공입니다. 끝. 아니, 사실 그게 끝은 아닙니다. 주인공이라고 다는 아니니까. B는 악당이 여럿 나오는 이 이야기에서 가장 교활하고 유능한 악당입니다. 그리고 남자를 조종하기 위해서 자신의 유능함을 감추고 여린 척하지도 않아요. 그냥 대놓고 '나는 지금부터 너를 이용해 먹을 거야. 싫어? 싫어도 네까짓 게 어쩔 건데.'라고 합니다. 네오 누아르에서 반드시 나오는 야한 섹스 장면도 마찬가지. 보통 아무리 센 팜므파탈이 나오더라도 이런 장면들에서만큼은 팜므파탈이 이중의 의미로 착취당합니다. 자신이 잡아먹을 남자에게 그때만큼은 지고의 쾌락을 제공하면서 착취당하고, 영화 산업이 요구하는 남성 중심의 쾌락을 위해 배우가 자신을 전시하면서 착취당하죠. 그런데 [마지막 유혹]의 B는 그마저도 허용하지 않습니다. B에게 C는 생체 딜도라는 사실이 모든 면에서 너무나도 뚜렷하거든요. 대사로도 여러 번 나와요. 심지어 C를 처음 만났을 때 B가 하는 일이…… 아니, 그만하죠. 이 영화에서 저를 놀라고 기쁘게 한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자면 끝이 없습니다. 아무튼 몰개성하기 짝이 없는 제목만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빼어나고 '독창적'인 네오 누아르입니다. 언젠가 나올지 어떨지도 모르는 더 나은 Blu-ray를 막연히 기다리지 않길 잘했어요.

 (여담입니다만 Scorpion Releasing의 설립자요 경영자인 월트 올슨은 지난가을 척수종양으로 수술대에 올라 한동안은 타이핑도 못 하는 지경이었습니다. Scorpion Releasing은 사실상 1인 기업이나 다름없으니 당연히 모든 출시 계획이 오랫동안 미뤄질 줄 알았죠. 하지만 눈에 띄는 공백 없이 계속 근사한 신규 타이틀이 나오더군요. 월트는 이내 Blu-ray.com 포럼으로 돌아와서 회원들과 열심히 소통하고 있고요. 그 강인함에 경의를 표하며, 건강을 빕니다.)







7. Someone's Watching Me! (Shout! Factory)


 2018년 7~8월, Shout! Factory에서 워너브라더스에서 소유한 존 카펜터 영화 세 편을 Blu-ray로 내놓았습니다. 이중 단연 인기 있었던 출시작은 (이미 괜찮은 Blu-ray가 나와 있었던) [광기의 입 안에서(In the Mouth of Madness, 1994)]였고, TV 영화 [누군가 날 보고 있어!(Someone's Watching Me!, 1978)]와 [투명인간의 회고록(Memoirs of an Invisible Man, 1992)]은 전작을 모으면 성에 차지 않는 열성팬을 위한 곁다리 정도로만 취급 당했습니다. 그러나 영미권 팬들의 카펜터 이해에 불만이 많은 저는 그런 관성적인 반응이 못마땅합니다. [광기의 입 안에서]가 훌륭한 공포 영화인 건 맞아요. 하지만 [투명인간의 회고록]도 유니버설 투명인간 영화들의 계보를 잇는 훌륭한 투명인간 영화입니다. 결코 괴작도 망작도 아니고 시시한 코미디도 아니에요. 감탄할 만한 표현들이 잔뜩 있습니다. 특수효과 품질을 걱정했는데 그것도 좋았어요. 카펜터를 무조건 공포/마초 액션과 등치시키고 그에 해당하지 않는 작품들을 일단 한 수 아래로 깔고 보는 시선만 버린다면 [투명인간의 회고록]에서도 많은 장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누군가 날 보고 있어!]는…… 이거 카펜터 최고 걸작 아녜요?!

 이 영화가 [안개(The Fog, 1980)]나 [괴물(The Thing, 1982)]이나 [크리스틴(Christine, 1983)]이나 [스타맨(Starman, 1984)]이나 [암흑의 군주(Prince of Darkness, 1987)]나 [그들이 살고 있다(They Live, 1988)]나 [광기의 입 안에서]나 [흡혈귀들(Vampires, 1988)]보다 무조건 낫다고 주장하지는 않겠습니다. 하지만 스티븐 스필버그의 팬 중에는 스필버그 최고작으로 [결투(Duel, 1971)]를 꼽는 사람들이 있고, 그 선택은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날 보고 있어!]는 카펜터에게 [결투]와 같은 영화입니다. TV용으로 저렴하게 빨리 만든 끝내주는 서스펜스 스릴러죠. 또 이 영화는 카펜터가 자신의 영화광 취향을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낸 작품이기도 합니다. 먼저 알프레드 히치콕.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North by Northwest, 1959)]를 장난스럽게 환기하며 시작한 영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열차 안의 낯선 자들(Strangers on a Train, 1951)]과 [현기증(Vertigo, 1958)]과 [싸이코(Psycho, 1960)]를 인용합니다. 마틴 스콜세지가 [셔터 아일랜드(Shutter Island, 2010)]에서 [싸이코]의 샤워기 쇼트를 그대로 베낀 것처럼 인용을 위한 인용이 아니고, 쿠엔틴 타란티노가 [킬 빌 Vol. 2(Kill Bill Vol. 2, 2004)]에서 빌과 브라이드가 재회하는 대목에 세르지오 레오네 서부극의 결투 장면 리듬을 도입했듯 다른 영화의 특징적인 기법을 자신의 맥락에 맞게 변형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인용이에요. 그리고 이러한 변용의 절정에는 [이창(Rear Window, 1954)]이 있습니다. [누군가 날 보고 있어!]는 [이창]의 관음하는 남성 시선에 대한 독후감이자 반박입니다. 물론 [이창] 자체가 제임스 스튜어트의 시선이 지닌 불온함을 폭로하는 영화이기는 합니다만, 여기서는 아예 창 너머 남자의 시선에 일방적으로 노출당하는 여자가 주인공이죠. 카펜터는 이 여자가 위험에 노출됐음을 보여준답시고 아무것도 모른 채 나신으로 집안을 돌아다니는 여자의 모습을 스토커의 망원경을 통해 보여준다거나, 여자에게 신체적 위협을 가하는 따위의 짓은 일절 하지 않습니다. 사실 97분에 달하는 상영 시간 동안 클라이맥스 이전까지는 주인공에게 거의 아무런 물리적 위해가 가해지지 않는다는 점이 이 영화의 가장 뛰어난 점입니다. 카펜터는 관음하는 시선 자체가 폭력임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대사로도 나옵니다(각본도 카펜터가 썼습니다).

 그리고 하워드 혹스. 저는 여기서 좋아서 미쳐 버리는 줄 알았습니다. 아니, 카펜터가 하워드 혹스 열혈팬이라는 거야 잘 알았지요. 그가 공포/액션 영화에서 공간을 구축하고 액션을 조직하는 방식은 하워드 혹스와 관련지어 더 논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3분서 습격(Assault in Precint 13, 1976)]이 [리오 브라보(Rio Bravo, 1959)]에서 소재를 차용했으며 편집을 자신이 해놓고 크레딧에 편집자 이름은 존 T. 챈스로 올렸다든가, [할로윈(Halloween, 1978)]에서 아이들이 TV로 [외계에서 온 것(The Thing from Another World, 1951)]을 시청하는 모습이 나오고, 결국 [외계에서 온 것]을 리메이크한 [괴물]을 만들기에 이르렀다는 잡지식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런데 그런 저도 설마 카펜터가 혹스식 여성을 단독 주인공으로 내세우는 (反-) 알프레드 히치콕 영화를 만들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로렌 허튼이 연기한 주인공 리는 완벽한 혹스식 여성입니다(Leigh라는 이름부터가 혹스의 믿음직한 동료였던 여성 작가 리 브래킷을 떠올리게 합니다). 혼자 벌어서 혼자 사는 유능한 전문 직업인이고, 오는 남자 거절하고 마음에 드는 남자에게 먼저 들이대는 성적 자결권을 누리며, 배짱이 두둑하고, 유머 감각이 풍부하지요. 심지어 [베이비 길들이기(Bringing Up Baby, 1938)]의 캐서린 헵번 인용까지 있습니다. 이야기의 성격상 결국 리가 패닉에 빠지고 궁지에 몰리는 순간이 옵니다만, 그 시점은 여성이 피해자로 등장하는 통상의 공포 스릴러보다 훨씬 늦게 찾아옵니다. 리는 그런 상황에서조차 행동과 사고를 멈춘 채 다른 남자의 구원을 기다리지 않고요. 게다가 맙소사, 리의 곁에는 에이드리언 바보가 연기한 레즈비언 직장 동료 소피가 있습니다. 동성애적 함의 아닙니다. 리와 처음 만난 자리에서 바로 커밍아웃해요. 이성애자인 리와 동성애자인 소피가 목숨을 건 우정을 나누는 모습은 어쩌면 종종 동성애에 가까운 우정을 나누는 혹스식 남성들을 유쾌하게 비튼 오마주 같기도 합니다. 리에게는 남자친구도 있고 신고를 받고 사건을 조사하는 남자 형사도 있습니다만, 이 남자들이 리와 소피를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한다든가 대신 문제를 해결하는 전개 따위는 나오지 않습니다. 아니, 이런. 흥분해서 리뷰가 되고 있군요. 그만하겠습니다.

 Shout! Factory는 2018년에도 좋았다 나빴다 했습니다. 출시작이 겹치는 경우가 잦아 Arrow Films와 비교되곤 하는 출시사지만, 실력을 따지면 요즘 Shout! Factory는 Arrow Films보다는 Kino Lorber와 비슷하죠. 원 저작권자에게서 받은 소스가 좋으면 좋은 타이틀이 나옵니다. 소스가 별로면 별로인 대로 내고요. 출시 계획을 연기하고 더 좋은 소스를 찾아 헤맨다든지, 열혈팬들의 요구에 맞추어 굳이 필요하지 않은 버전을 기를 쓰고 찾아 수록한다든지 하는 열의를 자주 발휘하지는 않습니다. 또 검수에 허점이 많고 문제가 발견되더라도 사소하다면 별다른 대응 없이 어물쩍 넘어가는 일도 드물지 않습니다. 심지어 2018년의 대박 타이틀 [크립쇼(Creepshow, 1982)]에서도 5.1채널 오디오 트랙을 피치가 잘못된 채로 수록하는 오류를 범해 놓고 조용히 넘어간 건 너무했어요(어차피 오리지널 2.0 스테레오 트랙의 음질이 더 우수해서 구매자들도 크게 반발하지는 않았습니다만). 그런 사건 사고가 잦다 보니 흠잡을 곳 없이 준수한 품질을 자랑하는 타이틀도 덩달아 묻힐 지경입니다. 다행히 [누군가 날 보고 있어!]는 흠잡을 곳 없이 준수한 품질을 자랑하는 타이틀에 속합니다. 인터포지티브 필름을 2K 복원한 화질은 기가 막힙니다. TV 방영용 오리지널 1.33:1 화면비와 위아래를 자른 1.85:1 와이드스크린 비율 두 종류를 제공하고요. TV 영화 전문가로 떠오르고 있는 아만다 레예스의 본편 음성해설 외에 초기 카펜터 단골 배우인 에이드리언 바보와 찰스 사이퍼스 인터뷰도 새로 수록했습니다. DVD 시절에 수록됐던 카펜터 인터뷰도 있고요. 그리고 [자신을 속인 남자] Blu-ray와 마찬가지로 촬영지 방문 영상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상당수 장면이 아파트 안을 무대로 하기 때문에 뭐 얼마나 볼 게 있겠나 했다가 기대 이상의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Blu-ray.com의 리뷰어 닥터 스티븐 라슨이 내린 결론에 완전히 동감입니다. "This package comes HIGHLY RECOMMENDED and is an ABSOLUTE MUST BUY for Carpenter fans."







6. Dietrich & Von Sternberg in Hollywood (Criterion)


 다른 조건이 모두 동일하다면 영화를 보는 스크린의 크기는 크면 클수록 좋습니다. 그러므로 영화를 보는 최적의 환경은 여전히 대형 스크린이 있는 영화관이고요. 저는 아직도 휴대폰으로는 한 번도 영화를 본 적 없고, 앞으로도 맹렬히 거부할 겁니다. 그렇습니다만, 스크린의 크기가 영화의 감흥을 결정하는 절대적인 요소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다양한 크기의 노트북, 데스크탑 모니터, 4:3 CRT TV, 16:9 평면 와이드 TV, 가정용 스크린으로 영화를 보았고, 그 모든 환경에서 길이 기억에 남는 영화를 만났습니다. 정말로 마음에 드는 영화를 홈 비디오로 보고 나서 '아, 이 영화는 더 큰 스크린에서 봐야 했는데'라고 탄식한 적도 별로 없고, 반대로 큰 스크린에서 처음 만났던 영화를 더 작은 스크린에서 다시 보면서 영화의 힘이 약해졌다고 한탄한 적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앞서 "다른 조건이 모두 동일하다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조건이 모두 동일한 가운데 스크린 크기만 달리해 영화를 보는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겠지요. 제가 어떤 영화를 보면서 처음 만났던 순간을 그리워한다면 그건 보통 스크린의 크기보다 함께 영화를 본 사람들이 그리워서입니다. 스크린의 크기라는 요소는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중요하기는 하지만) 과대평가되는 면도 없지 않은 듯합니다.

 그러나 제가 [모로코(Morocco, 1930)]에서 턱시도를 입고 무대에 나타나 청중들을 오시하는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클로즈업을 볼 때마다 2010년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이 영화를 처음 본 순간으로 돌아가고야 마는 것은 틀림없이 객석보다 한참 높은 단상 위에 펼쳐진 큰 스크린에 대한 그리움 때문입니다. 조셉 폰 스턴버그가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함께 만든 영화들을 보다 보면 그가 활동사진을 일부러 정지시켜 스틸 사진이나 패션 화보처럼 다루면서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숭배하는 신전에 모실 영원불멸의 이미지를 천천히 아로새기는 중이라는 기분이 들곤 합니다. 그중에서도 독일 배우 디트리히가 할리우드로 건너와 처음으로 출연한 미국 영화에서 하필이면 낯선 땅에 도착하자마자 카바레 무대에 서게 되는 공연자 역을 맡아서 남자 관객들이 보내는 욕정과 야유에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이런 상황쯤이야 이미 다 꿰고 있다는 듯 태연자약한 얼굴로 약간의 경멸과 비웃음이 담긴 듯한 눈길을 던질 때, 바로 그때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틀림없이 그 공간의 누구보다도 거대한 존재가 되어 스크린 안팎의 관객들 모두를 내리 보면서 자신은 이 엔터테인먼트라는 난장판 속으로 들어온 선수이며 이 바닥의 생리에 따라 생계를 이어나가겠지만 관객과 짜고 치는 이 가면극에 완전히 몰입해 스스로를 억누르고 감출 뜻은 추호도 없으며 오히려 너희는 앞으로 모든 순간에 바로 나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우러러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이미지가 자리해야 할 곳은 객석보다 높은 단상 너머 닿을 수 없는 곳에 설치된 거대한 스크린 위여야만 하며, 그 외의 모든 관람 환경에서는 화면 속의 마를레네 디트리히가 환기하는 가상의 스크린과 실제 스크린 사이의 불일치로 인해 아찔한 현기증과 달랠 길 없는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Criterion이 제아무리 마를레네 디트리히와 조셉 폰 스턴버그가 할리우드에서 만든 영화 여섯 편을 한자리에 모아 선보이는 위업을 달성했더라도 이 Blu-ray 박스 세트는 결국 집안 한구석에 마련한 미니어처 제단, 진정한 신전의 모조품에 불과한 것으로…… 가만, 이야기가 왜 이렇게 됐죠?

 ……하지만 그런 제단을 집안에 설치할 수 있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사실 그동안 보지 못해 애가 탔던 [불명예(Dishonored, 1931)]와 [상하이 특급(Shanghai Express, 1932)]을 처음 보게 된 것만으로도 제게 이 박스 세트의 가치는 차고도 남았습니다. 특히 [불명예].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요란한 멜로드라마를 모조리 솜씨 좋게 해치우면서도 이 모든 일이 나와는 무관한 놀음에 불과할 뿐이라는 조소를 잃지 않는 마를레네 디트리히 특유의 초연한 오만이 그 어떤 영화보다도 도드라지는 그 영화는 [모로코]와도 자웅을 겨룰 만하더군요. [모로코]가 [현기증]이라면 [불명예]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랄까. 박스 세트의 규모나 영화의 명성에 비하면 부록이 부족하다는 불평도 있던데, 글쎄요, 그렇게 투덜거리기에는 꽤나 알찬 구성 아닙니까? [상하이 특급] 디스크에는 영화와 오리엔탈리즘을 연구하는 영화학자가 [상하이 특급] 속의 중국 묘사와 배우 애나 메이 웡에 관해 논하는 인터뷰를 싣고, [금발의 비너스(Blonde Venus, 1932)] 디스크에는 마를레네 디트리히-조셉 폰 스턴버그 영화의 의상을 집중 조명하는 등 각각의 영화에 어울리는 부록을 기획해서 꾸려 넣은 기획력은 칭찬해야지요. [악마는 여자다(The Devil is a Woman, 1935)]에 부록이 없다시피 한 건 아쉽지만, 이모젠 사라 스미스 등이 참여해 장문의 에세이를 실은 80쪽짜리 책자도 있는데 배부른 불평을 늘어놓고 싶진 않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니까 이제 제발 다른 조셉 폰 스턴버그 영화도 내주세요. [미국의 비극(An American Tragedy, 1931)]에는 실비아 시드니가, [죄와 벌(Crime and Punishment, 1935)]에는 피터 로르가, [상하이 제스처(The Shanghai Gesture, 1941)]에는 진 티어니가 출연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초조해진다고요. 아니면 마를레네 디트리히를 만나기 전에도 조셉 폰 스턴버그는 이미 어마어마했음을 증명하는 무성 영화들도 좋고요.







5. Raw Deal (Classic Flix)


 영화 권하는 마틴 스콜세지는 영화 만드는 마틴 스콜세지보다 더 고맙고 믿을 만한 사람입니다. TV 다큐멘터리 [마틴 스콜세지와 함께하는 사적인 미국 영화 여행(A Personal Journey with Martin Scorsese Through American Movies, 1995)]를 통해 알게 된 이래 십수 년을 기다려 마침내 확인한 [로 딜(Raw Deal, 1948)]은 다시 한 번 그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Classic Flix에서 출시한 앤소니 만 필름 누아르 세 편을 모두 무척 좋아합니다만, 그중에서도 [로 딜]은 필름 누아르 명예의 전당에 들어가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부주의하게 요약한다면 남자 범죄자가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 사이에서 갈등하는 이야기라고 소개할 수도 있을 테고, 그런 요약을 듣고 영화를 보면 정말 그런 이야기라고 착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로 딜]은 오히려 그런 전형들을 끌어들인 다음 대놓고 교란하는 영화입니다. 착한 여자는 옴므파탈을 갱생시키겠다는 선의로 충만한 나머지 끝없이 윤리를 내다버리고, 나쁜 여자는 옴므파탈에 대한 절대적인 사랑 때문에 윤리적인 결단에 이릅니다. 데니스 오키프가 연기한 남자 주인공은 겉보기와 달리 서사를 주도하지 못합니다. 이는 필름 누아르 특유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 권한이 나쁜 여자 클레어 트레버에게만 주어진다는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지요. 그리고 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좋은 친구들(Goodfellas, 1990)]에서 레이 리오타가 들려주는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만큼이나 영화사에 길이 남을 만합니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에서는 정보 전달보다는 음색과 어조가 더 중요한 법. [로 딜]에서는 심지어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고 캐릭터들이 다 등장하기도 전에 단지 클레어 트레버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아, 이 영화는 됐다!'는 감동이 입니다. 저는 원래 클레어 트레버라는 배우를 알지도 못했고 따로 출연작 목록을 훑으며 열심히 챙겨 본 적도 없으며 그저 다른 이유에서 찾아 본 여러 영화들을 통해 차츰 얼굴을 익히게 됐는데요, 지금 돌아보니 그렇게 본 출연작들이 [역마차(Stagecoach, 1939)], [살인, 내 사랑(Murder, My Sweet, 1944)], [살인 본능(Born to Kill, 1947)], [로 딜], [키 라고(Key Largo, 1948)], [거칠게, 빠르게, 아름답게(Hard, Fast and Beautiful, 1952)], [다른 동네에서 보낸 두 주(Two Weeks in Another Town, 1962)]라는 사실에 혀를 내두를 따름입니다. 그밖에 존 알튼의 촬영이나 앤소니 만의 지독한 폭력 묘사야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Classic Flix는 2017년에 이어 2018년에도 열심히 일했습니다. 다만 저는 그만큼 열심히 보지 못했습니다. 2017년에 사업을 시작했을 때는 출시작 하나하나를 열심히 따라가며 구매했는데, 비정기적으로 자주 할인 행사가 있다 보니 오히려 구매 순위에서 밀렸습니다. 잦은 할인은 출시사와 소비자 모두에게 장기적으로는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지. 2019년에는 밀린 출시작들을 챙길 수 있으면 좋겠군요.







4. Night of the Demon (Powerhouse Films)


 [악마의 밤(Night of the Demon, 1957)]을 처음 본 건 당연히 발 루튼 영화에 푹 빠져 있을 때였습니다. 복원 및 Blu-ray 출시가 늦어져 그렇지 구해 보기는 어렵지 않은 영화였습니다. Columbia Tri-star에서 출시한 DVD에도 [악마의 밤]이라는 제목이 달린 96분짜리 영국판과 [악마의 저주]라는 제목이 달린 82분짜리 미국판 둘 다 1.66:1 아나몰픽 영상으로 수록돼 있었고요. 처음 보았을 때는 재미있기는 하지만 발 루튼이 직접 제작한 영화들보다는 못하다고 여겼습니다. 발 루튼 공포 영화는 불가사의한 공포의 실체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사건을 겪는 인물의 심리에 주목하도록 하는 수법을 즐겨 사용합니다. 정말로 초자연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일 수도 있고, 관찰자의 불안이 착각을 낳은 것일 수도 있다는 식이지요. 작품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기는 해도 기조가 되는 모호함과 다면성만은 늘 건재했습니다. 윗선의 압력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흑표범이 어슬렁거리는 모습을 집어넣은 첫 영화 [캣 피플(Cat People, 1942)]에서조차도요. 반면 [악마의 밤]은 첫 시퀀스에서부터 악마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힘이 떨어진다고 여겼습니다. 제작사의 요구 때문에 억지로 악마를 삽입했다는 얘기를 들으니(이 Blu-ray에 수록된 크리스토퍼 프레일링의 인터뷰에 따르면 그건 정확한 정보가 아니었습니다) 원래 계획했던 대로 악마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훨씬 끝내주는 영화가 되었겠다 싶었고요. 그래서 이후 다른 발 루튼 영화들은 여러 번 보았지만 [악마의 밤]은 잘 찾아 보지 않았습니다.

 이 Blu-ray가 출시되기 전까지 여러 가지 간접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미국적인 것과 영국적인 것을 구분하고 후자를 좀 더 즐길 줄 알게 됐습니다. 과잉과 결여를 통해 겉보기보다 훨씬 많은 것을 전달하는 이야기에도 더 익숙해졌고요. 또 출판사 현대문학 덕분에 [악마의 밤]의 원작인 "룬 마법"을 포함해 몬터규 로즈 제임스의 여러 단편을 좋은 번역으로 접할 수 있게 됐습니다. 그런 다음 다시 본 [악마의 밤]은 예전과는 다른 영화였습니다. 표면상 회의론자인 주인공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점차 초자연적인 존재인 악마를 향해 다가갑니다. 그런데 그럴수록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히려 상황의 세속성입니다. 악마를 이용하는 줄리안 카스웰 박사의 소박하고 좀스럽기 짝이 없는 동기, 악마에 대한 공포를 이용해 모은 재물로 유지하는 으리으리한 저택, 동네 아이들을 대하는 방식에서 상상해 볼 수 있는 박사의 과거, 박사의 악마에 대한 불완전한 이해와 지배, 어머니와의 관계, 박사가 홀든에게 접근하는 장소의 구체성, 접근하는 방식의 하찮음, 악마의 정체를 기록한 책을 열람하는 과정, 저주를 작동시키는 방식, 저주를 되돌리는 방식 등등. 이런 세속성은 초자연적인 존재로 등장했던 악마의 세계를 점차 물질 세계로 끌어내리고 때로는 사기꾼의 협잡처럼 보이게까지 합니다. 카메라 앞에 명명백백하게 악마가 등장해서 사람을 죽이고 홀든이 굳건했던 회의를 얼마간 거둔 뒤에도, 어쩐지 이 모든 일이 착각이자 오해이며 환상에 불과할 것만 같다는 기분이 듭니다. 그러니까 다시 본 [악마의 밤]은 발 루튼 공포 영화와는 정반대로 작동한 셈입니다. 악마론의 허구를 증명하기 위해 영국에 온 홀든을 취재하러 온 영국 기자가 우리 영국인들은 유령을 좋아하니까 살살 해달라고 웃으며 당부할 만도 했어요. 이 유머러스한 세속성 너머로 어른거리는 몬터규 로즈 제임스의 그림자가 정겹습니다.

 (참고로 Scorpion Releasing에서 출시한 미켈레 소아비 감독의 [교회] 역시 몬터규 로즈 제임스의 "토마스 수도원장의 보물"을 원작으로 내세우고 있습니다만, 그쪽은 원작을 따지는 게 의미 없는 수준입니다.)


 Powerhouse Films의 Indicator 레이블이 [악마의 밤] Blu-ray에 들인 공은 황당하기까지 합니다. 먼저 버전. 사실 이 영화는 DVD처럼 96분짜리 영국판과 82분짜리 미국판 두 버전으로만 수록해도 충분합니다. 그런데 Powerhouse Films는 굳이 ① 오리지널 버전 (96분, "악마의 밤") 1.75:1 화면비, ② 오리지널 버전 (96분, "악마의 밤") 1.66:1 화면비, ③ 미국 재개봉판 (96분, "악마의 저주") 1.75:1 화면비, ④ 미국 재개봉판 (96분, "악마의 저주") 1.66:1 화면비, ⑤ 영국 극장판 (82분, "악마의 밤") 1.66:1 화면비, ⑥ 미국 극장판 (82분 "악마의 저주") 1.66:1 화면비를 선택할 수 있게 했습니다. 화면비나 오프닝 크레딧에 어떤 제목이 뜨느냐까지 모두 구분해 옵션을 제공한 거죠. 그리고 부록. Powerhouse Films는 이 영화가 공포 영화 팬들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안 그래도 평소에도 특별 대우하는 영국 영화 아니겠습니까. 어느 하나 시시한 부록이 없습니다. 그중에서도 "Appreciations"라는 제목 아래 묶은 전문가 인터뷰 모음에는 넙죽 엎드리고 싶어집니다. 이미 본편에 끝내주는 음성해설이 있고, 영화에 직접 참여한 사람들의 인터뷰를 묶은 20분짜리 다큐멘터리가 있고, 버전별로 다른 점을 논의한 23분짜리 비디오 에세이가 있고, 제작자의 51분짜리 인터뷰가 있고, 주연 배우 데이나 앤드루스의 10분짜리 인터뷰가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거기에다 추가로 이 영화에 할 말 있는 영화 전문가 일곱을 한 명씩 섭외해서 인터뷰를 땄습니다. 이 인터뷰들만 다 합쳐도 분량이 세 시간에 달합니다. 더욱이 이렇게 여러 사람이 각자 따로 이야기를 했는데 겹치는 내용이 없습니다. 사람을 모으기만 한 게 아니라 조율도 철저히 했어요. 물론 부록은 거기서 끝이 아닙니다. 배우 마이클 호던이 몬터규 로즈 제임스의 원작을 낭독한 오디오가 있고, 같은 원작을 토대로 만든 라디오극이 있고, 가정용 슈퍼 8mm 축약본이 있고, 프로덕션 디자이너 켄 아담스가 소장하고 있던 스틸 사진, 포스터, 밑그림이 있고…… 그런 다음 다시 80쪽짜리 책자가 있는데, 이 내용이 또 디스크에 든 부록과 겹치지 않을 뿐더러 다양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 영화에서 마법 관련 자문을 맡은 이집트학, 고고학, 민속학자 마거릿 앨리스 머레이가 어떤 사람이었고 연구 내용은 어떠했으며 영화와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빼곡하게 네 쪽에 걸쳐 서술한 에세이가 실린 걸 보고는 할 말을 잃었어요. 이렇게까지 노력해 줘서 참 고맙기는 한데 이쯤 되면 징그럽기도 합니다. 출시사의 집요함을 기준으로 한다면 Powerhouse Films의 [악마의 밤] 한정판은 단연코 2018년 최고의 타이틀입니다. 다행히 출시 일정을 1년이나 미루면서 준비한 이 Blu-ray는 그에 어울리는 환영을 받았습니다. 애초에 평소 출시하는 다른 타이틀보다 두 배 많은 6천 장을 생산할 예정이었던 한정판은 기대 이상으로 밀려든 주문 덕분에 8천 장으로, 다시 1만 장으로 늘어났고, 4개월만에 거의 모든 물량을 소진했고, 책자와 포스터와 아웃케이스를 뺀 일반판이 출시됐을 정도입니다. Batman: The Complete Animated Series 한정판은 69048개를 생산했다고 하고, Ingmar Bergman's Cinema는 며칠만에 초판을 전부 소화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습니다만, 여러 편의 영화를 담은 박스 세트가 아닌 1957년에 만든 두 시간도 안 되는 컬트 공포 영화 한 편의 Blu-ray가 이렇게 사랑 받는 것 또한 일대사건이라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3. A Matter of Life and Death (Criterion)


 한국에 "DVD 시장"이라는 게 나름대로 큰 규모로 존재했던 옛날, 스펙트럼이라는 출시사가 있었습니다. 한국의 DVD 수집가들에게는 익숙한 이름일 겁니다. 보통은 [반지의 제왕] 확장판 박스 세트라든가 [킬 빌] 연작, [트루 로맨스(True Romance, 1993)]와 [레옹(Léon, 1994)], 혹은 홍콩 영화들을 공들여 내놓았던 출시사로 기억되겠지요. 그렇습니다만 스펙트럼은 그보다 훨씬 더 괴상한 출시사였습니다. 스펙트럼은 MGM과 정식 계약을 맺어 스탠리 큐브릭의 초기작 세 편을 박스 세트, [알프레도 가르시아의 목을 가져와라(Bring Me the Head of Alfredo Garcia, 1974)], [기나긴 이별(The Long Goodbye, 1973)] 등의 DVD도 출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잉마르 베리만 콜렉션이나 마스터피스 콜렉션, 러시코 콜렉션 같은 하위 레이블을 두어 더욱 상상도 못할 영화들까지 선보였어요. 한때 한국에서 [영국 여인과 공작(L'Anglaise et le Duc, 2001)], [학이 난다(Летят журавли, 1957)], [와서 보아라(Иди и смотри, 1985)], [수람 요새의 전설(Ambavi Suramis tsikhisa, 1985)], [스파이더(Spider, 2002)], [주말(Weekend, 1967)], [문라이팅(Moonlighting, 1982)], [아마도 악마가(Le Diable probablement, 1977)], [데르수 우잘라(Дерсу Узала, 1975)] 같은 영화들이 모두 정식 판권을 얻어 DVD로 제작, 판매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초기에는 Criterion 컬렉션을 무단 리핑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드는 타이틀도 있었지만, 몇 번 이야기가 나온 뒤에는 분명히 정식 판권을 얻어 다른 소스로 출시했습니다. (참고로 이때 스펙트럼에서 활약한 이가 [씨네21]의 이용철 평론가입니다. 당시 그는 인터뷰에서 자신은 평론에 뜻이 없음을 밝혔는데, 그런 그가 계속 홈 비디오 업계에서 활약하지 못하고 평론가가 된 것은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 보면 기적과도 같은 스펙트럼 출시작 중에는 파웰 & 프레스버거 콜렉션도 있었습니다. 프랑스 Carlton과 정식 계약을 맺어 출시한 이 디스크 네 장짜리 박스 세트는 Criterion 판본만큼 화질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크게 뒤쳐지지도 않았고, Criterion 디스크에도 없는 부가 영상이 있었으며, Criterion에서 출시한 [블림프 대령의 삶과 죽음(The Life and Death of Colonel Blimp, 1943)], [검은 수선화(Black Narcissus, 1947)], [빨간 구두(The Red Shoes, 1948)] 말고도 [천국으로 가는 계단]이라는 작품이 수록돼 있었습니다. 바로 [삶과 죽음의 문제(A Matter of Life and Death, 1946)]입니다. 마틴 스콜세지 '선생님'께서 마이클 파웰과 에머릭 프레스버거의 영화들을 좋아한다는 얘기를 듣고 솔깃했지만 그런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감독들의 영화가 한국에 정식으로 출시되었을 리 만무하다는 생각에 낙담부터 하던 제가 파웰 & 프레스버거 영화가 한 편도 아니고 네 편이나 DVD로 출시됐다는 사실을 깨닫고 얼마나 기뻤을지 상상해 보시길. 박스 세트의 모습은 아름다웠고, 두 감독은 저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네 편을 연도 순서대로 보았는데, 어느 영화를 가장 좋아했는지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대신 가장 덜 좋아했던 작품이 [삶과 죽음의 문제]였다는 건 고백할 수 있습니다. 안 좋아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초면부터 뒤통수를 후드려 까는 다른 세 편과 비교하면 재치 있지만 다소 얌전한 환상 로맨스라고 여겼다는 얘기죠. 저만 그랬던 건 아닌 모양인지, 당시 [펀치 드렁크 러브(Punch-Drunk Love, 2002)]를 좋아했던 친구가 이런 특이한 로맨스 영화 없느냐고 했을 때 이 영화를 추천했는데 시큰둥한 반응이어서 낙담했던 기억도 나는군요(참고로 그 친구는 나중에 서울충무로국제영화제에서 [빨간 구두] 복원판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2K, 4K 복원과 Blu-ray 시대에 들어와서도 사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상황이 더 나빠졌다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파웰과 프레스버거의 컬러 영화들을 디지털 복원판으로 본 뒤로는 더는 스펙트럼판 DVD를 보지 않게 되었으니까요. 박스 세트의 다른 수록작들은 일찌감치 복원되어 Blu-ray로 나왔지만, [삶과 죽음의 문제]만은 감감무소식이었고, 재감상은 미뤄지기만 했습니다. 마틴 스콜세지와 델마 스쿤메이커의 마이클 파웰 사랑을 믿고 기약 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다림 끝에 마침내 복원판 [삶과 죽음의 문제]를 보고 나니 지난날 저의 궁둥이를 걷어차 주고 싶어졌습니다. 이걸 왜 다른 셋보다 약하다고 판단했담? 파웰과 촬영감독 잭 카디프가 빚어낸 시각적 아름다움에 관한 경탄은 생략하기로 합시다. 다시 보며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건 이 영화가 발 루튼 영화와 흡사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나의 현상을 두고 상식적/과학적 해석과 환상적인 해석 사이를 오가되 둘 모두를 버리지 않는다는 점에서요. 예전의 저는 천국의 실수로 죽음을 모면한 남자가 뒤늦게 자신을 거두어 가려는 천국을 상대로 소송을 건다는 기발한 발상에만 집중해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단지 환상적인 이야기로만 단정지었고, 조지 리브시가 연기한 의사에게는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이런 이야기에서 주인공이 겪었고 관객이 직접 본 기기묘묘한 사건을 전부 뇌 손상에 따른 환상이라고 말하는 의사는 아무래도 인기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사실 프레스버거와 리브시는 전문가로서 자신의 지식과 판단에 충실하면서도 환자의 환상을 없애야 할 증상으로만 대하지도 않고 환자를 자신과 동떨어진 세계를 사는 사람 취급하지도 않은 채 진심으로 신뢰하고 발맞추어 나가는 의사를 그려 냅니다. 나중에 Blu-ray 부가 영상을 통해서 이 영화를 만든 사람들이 관련 의학 지식을 방대하게 조사했으며, 다이앤 브로드벤트 프리드먼이라는 신경 질환 환자를 전문으로 상대하는 간호사이자 뇌과학 연구자가 1992년에 [삶과 죽음의 문제]와 복합 부분 발작 묘사에 관한 논문 "A Matter of Fried Onions"를 발표했고, 다시 이 논문을 토대로 2008년에 [A Matter of Life and Death: The Brain Revealed by the Mind of Michael Powell]라는 신경 심리학 분야의 연구서까지 발표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는데, 놀라우면서도 당연하다 싶더군요. 그런 성실함이 이 영화에 놀라운 균형 감각을 부여합니다.

 일반적인 용례를 고려하면 "삶과 죽음의 문제"라는 번역은 너무 거창하고 딱딱하게 들립니다. "a matter of life and death"라는 표현은 그보다는 긴급함과 절박함을 담아 "(지금 당장) 사느냐 죽느냐가 걸린 문제"에 더 가깝게 들리지요. 실제로 그런 화급을 다투는 상황이 대미를 장식하는 영화이기도 하고요. 그렇지만 결국 [삶과 죽음의 문제]를 돌이켜보노라면 흑백과 컬러, 천국과 지상, 환상과 현실이 어느 한쪽을 선택하기를 강요하지 않고 뒤섞여 하나 된 안온함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다. 안락의자에 편안히 앉아 눈을 감고 미소를 머금은 채 삶은 뭐고 죽음은 또 무엇일까 느긋하게 궁리해 보는 듯하달까. 이건 그만한 시야와 여유, 그리고 균형 감각을 지닌 사람들이 빚어낸 영화입니다.

 (그런데 Criterion, 다른 건 다 좋습니다만 정녕 이 슬리브 커버 디자인이 최선이었나요?)







2. Bloody Spear at Mount Fuji (Arrow Films)


 Blu-ray 시장이 수집가용 한정판 중심으로 재편되고, SNS를 통한 소통이 활발해지고, 팟캐스트가 성행함에 따라, 출시사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는 한층 긴밀해졌습니다. 소비자들은 출시를 바라는 영화를 직접 건의하기도 하고, 저작권 상황을 따지며 출시 가능성을 타진하기도 하고, 출시사 관계자들의 발언을 통해 출시 예정작을 예측하기도 합니다. 출시사로서도 한결 좁아진 시장에서 자사 제품이 미리 관심과 기대를 불러모으는 상황이 싫을 리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이 어느 스튜디오와 계약했는지 밝히기도 하고, 이러저러한 작품을 복원 중이라고 미리 알리기도 하며, 몇 달 전부터 출시작을 예고하거나 힌트를 남기고, 경우에 따라서는 소비자들의 요청에 직접 응답하기도 합니다. 아울러 잠재 소비층을 예전보다 세밀하게 공략해야 하는 실정 속에서, 각 출시사들은 전보다 뚜렷하게 개성을 확립하면서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해 나가고 있습니다. 반드시 맞지는 않더라도 "그 영화는 A에서 출시할 리 없겠군. B라면 또 모를까." 같은 예측이 가능하다는 거지요.

 이런 변화는 다양한 즐거움을 가져다주었지만, 그만큼 어떤 영화의 출시 소식에 경악하는 일은 드물어졌습니다. 간절히 염원하던 영화를 Blu-ray로 볼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을 들으면 놀랍고 반갑기는 한데, '올 것이 왔구나'라면 모를까 '아니 18 그런 말도 안 되는!'이라고 반응하지는 않게 됩니다. 이미 많은 소망과 논의와 암시가 오고 간 뒤이기 때문입니다. 가령 Arrow Films에서 2019년에 [크루징(Cruising, 1980)]을 출시한다는 소식은 정말 반가웠지만, 사실 그 영화가 출시된다는 사실보다는 Arrow Films가 혹시 워너브라더스와 계약을 튼 게 아니냐는 전망이 더 흥분됐습니다. [크루징] 자체는 워낙 오랫동안 팬들이 바랐던 영화이고, [주술사(Sorcerer, 1977)]가 Blu-ray 시대 들어 재조명받았던 걸 보면 Warner Archive Collection을 통해서라도 나올 수밖에 없었거든요. 마찬가지로 저는 넷플릭스에서 배급 중인 [바람의 저편(The Other Side of the Wind, 2018)]이나 [로마(Roma, 2018)]가 Criterion을 통해 Blu-ray로 출시된다고 하더라도 전혀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또 마스무라 야스조나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들이 어디에선가 복원되어 출시되더라도, 물론 뛸 듯이 기뻐하겠지만, 놀라지는 않을 테고요. 당장 저부터가 Arrow Films나 Eureka에 틈만 나면 출시를 건의하고 있는데요.

 그런 환경에서, 우치다 토무 감독의 시대극 [후지산의 혈창(血槍富士, 1955)]이 Arrow Academy를 통해 출시된다는 소식은 정말로 충격적이었습니다. 원래 Arrow Films가 동급의 다른 출시사보다 일본 영화를 더 좋아하기는 합니다. Arrow Academy는 요시다 키주 박스 세트나 (소스 문제로 무기한 연기되기는 했지만) 짓소지 아키오 박스 세트를 발표하면서 자사의 일본 영화에 대한 관심이 스즈키 세이준이나 후카사쿠 킨지처럼 영미권에서 유명하고 잘 먹히는 장르 영화 전문 감독들에게만 국한되지 않았음을 입증했고요. 그럼에도 우치다 토무 + [후지산의 혈창] 조합은 허를 찌르는 선정이었습니다. 일단 우치다 토무는 영미권에서 유명한 일본 감독이 아닙니다. 하다못해 '이름은 많이 들었는데 본 적은 없는' 감독조차 아닐 거예요. AnimEigo에서 나카무라 킨노스케 주연의 미야모토 무사시 5부작 박스 세트를 DVD로 출시한 적은 있지만 거기서 핵심은 미야모토 무사시였지 우치다 토무의 이름이 부각되는 경우는 없었죠. 또 설령 우치다 토무라는 이름이 유명하지 않다 하더라도 [기아해협(飢餓海峡, 1965)]이 출시됐더라면 놀라지 않았을 겁니다. [기아해협]은 감독의 명성과 별개로 유명한 영화니까요. 하지만 [후지산의 혈창]에는 그런 후광조차 없습니다. 그렇다고 감독이나 작품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을 유혹할 만한 뚜렷한 미끼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제로의 초점(ゼロの焦点, 1961)]이나 [대살진(大殺陣, 1964)]이 출시되었더라면 그건 장르 팬들을 노린 선택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을 겁니다. 요시다 키주나 짓소지 아키오 박스 세트는 오시마 나기사에서 벗어나 아트 시어터 길드 영화들을 더 알고 싶은 팬들을 위한 기획일 테고요. 그런데 [후지산의 혈창]은 Arrow Video에 넣기에는 너무 얌전하고 액션이 없는 시대극이고, Arrow Academy에 넣을 만한 아트하우스 영화도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이 영화가 Blu-ray로 출시될 수 있을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고 심지어 희망사항 삼아 떠올린 적도 없어요. 그런데 그런 영화를 박스 세트라든가 다른 출시작의 연장선에서도 아니고 단독으로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내놓은 겁니다. 심지어 부록도 꽤나 열심히 넣어서요. 호올리 뻑킹 쒸잇. (어떤 타이틀의 가치를 영화나 부록의 품질 이전에 어느 출시사에서 어느 시점에 내놓았느냐를 기준으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영화에 대한 마음은 스크린 안과 밖을 가볍게 넘나들며, 관객들은 자주 스크린 안팎을 아우르는 견해를 밝히곤 하지 않나요?)

 제가 좋아하는 일본 시대극 중에는 봉건 질서를 비판하고 지배 계급의 추악함을 폭로하거나 사무라이라는 지배 계급의 종말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작품들을 보다 보면 이따금 위선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사무라이를 긍정적으로 다루든 부정적으로 다루든 결국 영화의 중심은 (비판의 대상이기도 한) 사무라이들이 차지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일본 시대극의 품질과 다양성을 고려하면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코바야시 마사키, 쿠로사와 아키라, 시노다 마사히로, 오카모토 키하치, 고샤 히데오, 이마이 타다시, 쿠도 에이이치, 야마다 요지 등 이름난 감독들이 만든 위명 쟁쟁한 시대극들조차 이러한 관습에서 벗어나는 모습은 좀처럼 보지 못했습니다. 물론 서부극이나 갱스터 영화처럼 폭력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장르도 사정은 마찬가지인지 모르죠. 그러나 스티븐 프린스가 쿠로사와 아키라에 관한 책에서 말했듯 일본 시대극의 사무라이는 무력 집단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공인된 지배 계급이기에, 사무라이의 시점에서 봉건 질서를 비판하는 일본 시대극이 위선적으로 느껴질 여지는 한결 큽니다(한국 사극도 남 말할 때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혈창의 주인인 사무라이에게서 서사의 주도권을 빼앗아서 다양한 인물 군상들에게 고루 나누어 주고, 자살이나 피살이 아닌 방식으로 지배 계급의 모든 권위를 부정하며, 피지배 계급 스스로 창을 들고 나리님들의 뒤를 따르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결론에 이르도록 하는 [후지산의 혈창]의 대범함은 소중합니다. 야마나카 사다오나 시미즈 히로시의 영화들이 떠오른다고 하면 지나칠까요? 그래도 이런 영화라면 조금 으샤으샤 호들갑을 떨어서 Arrow Films를 응원해 줄 필요가 있습니다.







1. It Happened Here (BFI)


 2011년에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인간의 조건(人間の條件, 1959-1961)]을 보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1부에서 만주인으로 출연한 일본인 배우들의 형편없는 중국어가 도마 위에 올랐습니다. 기술적으로 빼어난 이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단점이지요. 당시 [인간의 조건]을 숭배하다시피 했던 저는 옹호에 나섰습니다.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3년 만에 중국과 수교가 없는 일본 내에서 만든 일본 제국주의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영화다, 만주에 갈 수 없어 홋카이도에서 촬영해야 했고, 연기 경험이 있는 중국인 배우를 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인들이 만든 제2차 세계대전 영화처럼 모든 대사를 영어로 덮지 않고 명백한 한계를 감수한 채로 중국어 대사를 사용하기로 한 결정은 오히려 감동적이다, 대충 그런 주장이었습니다. 그러자 한 친구가 대꾸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정까지 고려해 가며 영화를 봐줘야 하나?

  1938년에 태어난 케빈 브라운로는 열한 살 때부터 영화 필름을 수집하기 시작했고 열네 살에 9.5mm 필름 카메라로 기 드 모파상의 단편 "포로"를 1940년대 프랑스를 배경으로 각색한 영화를 만든 될성 부른 떡잎이었습니다. 1956년, 영화사에서 보조 편집자로 일하던 이 열여덟 살 청년에게 뜻하지 않은 곳에서 영감이 찾아옵니다. 어느 날 길을 가던 그의 앞에 검은색 시트로엥─나치 독일의 게슈타포를 상징했던 자동차─이 달려와 서더니 한 사람이 튀어나와 길가 식료품점으로 들어가면서 차 안에 앉은 일행에게 독일어로 뭐라고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조지 오웰의 [1984]를 비롯한 대체 역사/SF 소설의 애독자였던 브라운로는 그 광경을 보고 나치 독일에 점령 당한 영국에 관한 영화를 기획합니다. 시작은 아마추어 홈 무비 수준이었습니다. 브라운로는 아무런 줄거리도 짜지 않은 채 친구 둘에게 나치 군복을 입혀 노동절 행사가 진행 중인 트라팔가 광장에 세워 놓고 무작정 카메라를 돌렸습니다. 성난 군중들이 소요를 일으키면서 촬영은 이내 중단됐고, 결과물은 신통치 않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계속해서 비슷한 유형의 영상물을 만들었습니다. 얼마 후 화면에 보이는 독일군의 수가 너무 적다는 지적을 받고 독일군 군복을 구하러 다니던 그는 군복 수집가이자 역사광인 열여섯 살 소년 앤드루 몰로를 만났습니다. 평소 영국에서 만든 전쟁 영화들의 형편없는 고증에 진저리를 치던 몰로는 브라운로가 찍은 영상을 보고 경탄하기는커녕 엉망진창이라고 타박하며 (무성영화 애호가였던 브라운로에게) 에리히 폰 스트로하임의 완벽주의를 들먹였습니다. 결국 의기투합한 두 십 대는 1940년대 영국의 모습을 철두철미하게 재현한 대체 역사 영화 제작에 본격적으로 착수합니다. 어떤 재정적 후원도 없이 사비로, 본업을 마치고 남는 시간 틈틈이, 비전문 배우들과 만들기 시작한 이 영화는 조금씩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습니다. 훗날 마찬가지로 대체 역사 혹은 역사 재현 영화의 달인으로 명성을 떨치게 되는 피터 왓킨스가 브라운로가 일하던 영화사 인맥을 통해 조감독으로 참여했습니다. 갓 카메라를 잡기 시작한 피터 서스치스키가 스물두 살의 나이에 촬영감독으로 들어왔습니다. 몰로가 조감독으로 일하던 [토요일 밤과 일요일 아침(Saturday Night and Sunday Morning, 1960)]의 제작자였던 브리티시 뉴 웨이브의 대표 감독 토니 리처드슨은 제작비 3천 파운드를 제공하면서 16mm 필름으로 찍던 영화를 35mm 필름으로 찍으라고 제안했습니다. 브라운로가 스트로하임 영화를 보러 극장에 갔다가 우연히 만난 스탠리 큐브릭은 필름 구하기가 어렵다는 말에 [닥터 스트레인지러브(Dr. Strangelove, 1964)]를 찍고 남은 자투리 필름을 기증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브라운로와 몰로는 이미 전쟁 때와는 많이 달라진 런던을 샅샅이 뒤져 가며 소품과 차량부터 가로등 모양 하나까지 과거를 집요하게 재현했고, 일요일 새벽 영국 육군장관 존 프로퓨모의 집 앞에서 나치 군악대를 이끌고 스피커로 독일 군가를 크게 틀며 행진 장면을 촬영했으며, 촬영에 쓸 나치 깃발을 수배하던 중 영국 내 나치 지지자들이 아돌프 히틀러 탄생일을 축하하는 자리에 초대된 끝에 진짜 나치를 영화에 출연시켜서 그가 자신의 신념을 설파하는 6분짜리 즉흥 토론 장면을 삽입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자료 화면을 단 한 쇼트도 사용하지 않은 이 장편 영화는 첫 촬영으로부터 8년 뒤인 1963년에야 완성되었고, 1964년에 영화제를 통해 첫선을 보인 뒤 여러 영화제에서 상영되어 논란을 불러일으켰고, 무엇보다도 6분짜리 토론 장면 때문에 억울하게도 반유대주의 나치 찬양 영화라는 비판을 두들겨 맞고 삭제된 뒤 배급사를 찾지 못하다가, 유나이티드 아티스츠에 팔려 1966년 5월 런던 파빌리온 극장에서 [007 썬더볼(Thunderball, 1965)]의 뒤를 이어 으리으리하게 개봉했고, 인산인해를 이루어 그 극장에서만 2만 3천 파운드를 벌었지만, 유나이티드 아티스츠는 브라운로와 몰로에게 선금 1만 파운드를 주었을 뿐 배급과 홍보에 들인 비용 때문에 수익을 남기지 못했다며 이후 단 한 푼의 수익도 주지 않았으며, 이 영화를 통해 본격적으로 주류 영화계에서 다음 영화를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던 두 남자는 (이후 장편 극영화 하나를 더 만들기는 했지만) 각각 영화 복원 전문가/영화사가 혹은 프로덕션 디자이너/역사 전문가로 경력을 이어나가게 되었습니다.

 이상의 사실을 일부는 알고 일부는 모른 채로 [이곳에서 일어난 일(It Happened Here, 1964)]을 보는 내내 제 머릿속에는 '아니…… 대체 이걸 어떻게…… 말도 안 돼…… 이럴 수가…….'만이 맴돌았습니다. 그래 봐야 십 대들이 거의 무예산으로 취미 삼아 시작한 영화 아닙니까. 완성에 8년이 걸렸다지만 안정적으로 촬영을 할 수 없어서 길어졌을 뿐일 테죠. 규모가 큰 장면은 사람 많은 곳에서 적당히 도둑 촬영했을 테고, 등장인물은 적을 것이며, 화면에는 빈티를 감추려 애쓴 티가 날 테고, 아마추어 영화이니 당연히 촬영분이 부족해 틈만 나면 편집이 튈 것이며, 비전문 배우들의 연기에 많은 것을 기대할 순 없겠죠. 영화 보존/복원 업계에서 명망 높은 케빈 브라운로가 젊은 시절에 연출한 영화라는 사실이나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값과 대담한 설정 때문에 역사적 가치가 있는 영화로 대접받을 뿐, 냉정하게 보자면 그렇게 잘 만든 영화는 아닐 겁니다. 저는 대충 그렇게 짐작했고, 그래서 흥미가 생기기는 했지만 타이틀 구매도 한참을 망설였습니다. 그런데, 아니…… 대체 이걸 어떻게…… 말도 안 돼…… 이럴 수가……. [이곳에서 일어난 일]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규모가 크고 세련된 영화였습니다. 여전히 저예산 영화이기는 하죠. 하지만 예컨대 조지 A. 로메로나 존 카펜터가 만든 저예산 영화보다 가난한 티는 훨씬 덜합니다. 이 시점에서 이미 일개 애호가가 아니라 영화사가 수준의 지식을 쌓은 데다 업계에서 전문 편집자로 수련을 쌓았던 브라운로의 영상/음향 몽타주는 유려하고, 서스치스키는 처음 촬영감독을 맡은 영화에서 이미 근사한 구도와 조명을 자랑합니다. '40년대의 얼굴을 지닌 사람'을 우선 캐스팅했다는 비전문 연기자들은 연기의 숙련도 이전에 존재 자체로 보는 이를 설득하고요. 전란으로 가족을 잃었지만 애국심에 불타 나치를 몰아내기보다는 평화를 바랄 뿐인 여자 간호사가 생계를 유지하고 사회 질서 회복에 동참하기 위해 선의를 품고 사회적 활동에 나서면서 부지불식간에 파시즘에 동참하게 되는 이야기는 또 어떤가요. 한국 영화계는 여전히 일본강점기와 친일파라면 환장을 합니다만, 이 정도로 세밀하고 냉정한 통찰을 한 번이라도 보여준 적이 있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유려함 이전에, 가능할 리가 없는 광경들이 숨이 턱 막히는 압도적인 실감을 갖춘 채 쉴 틈 없이 들이닥칩니다. [그림자 군단(L'Armée des ombres, 1969)] 첫 장면에서 나치 군대가 파리 개선문 앞을 행진할 때 느끼는 모골이 송연한 감각이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돼요. 영화를 보는 내내 불신에 가까운 경이를 느끼면서, 과거 [인간의 조건]을 보고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습니다. 제가 느끼는 감동이 영상과 음향 자체에서만 비롯한 것인지 아니면 제작 과정에 관한 사전 지식에서 비롯한 것인지 구분하려 애썼으나 구분할 수 없더군요. 관객이 영화 만든 사람들의 사정까지 고려해 가면서 영화를 봐야 하나?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모르지요. 그렇지만 거꾸로 영화가 만들어진 맥락을 완전히 제거한 채로 '순수한 영화'만을 보는 일은 가능할까요? 거듭 말하지만 영화란 스크린 위에 펼쳐진 영상과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음향의 조합만은 아니며, 객석으로, 영화관 밖으로 흘러나왔다가 관객이라는 매개를 통해 다시 흘러 들어가는 모종의 기운까지를 아울러 존재하는 게 아닐까요?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저의 감상이 BFI에서 반세기 만에 복원하여 내놓은 지역 코드 제한 없는 Blu-ray 및 그 안에 빼곡하게 담긴 자료와 증언(이제 80세가 된 케빈 브라운로가 한 시간 넘게 카메라 앞에서 들려주는 제작 과정 이야기는 지루할 틈이 없습니다)을 배제한 채 성립할 수 있을까요?







0. Xtro (Second Sight)


 [엑스트로(Xtro, 1982)]는 원래 9위로 꼽아 두었는데 영화를 다시 보고 글을 쓰는 동안 0순위로 바꾸었습니다. 이 외계인 납치 영화에 대한 제 애착은 지나치게 사사로워 거리를 두고 풀이하기 어렵더군요. 그래서 0순위입니다. 다만 한 가지만 말해두자면 이 영화를 섣불리 괴작이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야기의 전개와 표현 방식이 종종 상식을 초월한다는 점에서는 괴작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거나 되는대로 갖다 던져서 붙으면 좋고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대충 만든 영화는 결코 아닙니다. 일견 '저게 뭐여?' 싶은 것도 모두 내적 논리와 짜임새를 갖추어 조리 있게 제시되고 있어서 여러 차례 감탄했습니다. 오히려 이 영화를 엉망진창이라고 단언하는 감독 해리 브롬리-대븐포트야말로 이 영화를 가장 과소평가하는 사람일 겁니다.

 Second Sight는 또 언제부터 이렇게 훌륭한 출시사가 된 거람? 하고 과거 출시작들을 살펴봤더니 예전부터 싹은 파랬던 출시사였네요. 다만 [행잉 록에서의 소풍(Picnic at Hanging Rock, 1975)]이나 [천국의 문(Heaven's Gate, 1981)]부터 [슈퍼 마리오 형제(Super Mario Bros., 1993)]나 [택시(Taxi, 1998)]에 이르기까지 워낙 출시 성향을 종잡을 수 없는데다 영어 자막을 넣었다 안 넣었다 했던 터라 마음에 두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쨌거나 그랬던 출시사가 2018년에는 독일 TV 시리즈 [하이마트] 전집을 선보이질 않나 [석류의 빛깔(Sayat Nova, 1969)]과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Berlin Alexanderplatz, 1980)]을 Criterion보다 낫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가꿔 내질 않나, 어느 틈에 영국을 대표하는 또 하나의 Blu-ray 출시사로 성장해 영화 애호가들의 가려운 곳을 제대로 긁어 주고 있습니다. 화질, 음질, 부록 구색, 소책자, 패키지 디자인 및 제작에 이르기까지 흠잡을 곳이 없어요. 음, 2018년의 대표작 중 하나인 [체인질링(The Changeling, 1980)]은 문제가 좀 있었지만─그것만 아니었어도 이 목록에 들었을 텐데─일단 소스에 문제가 있었던 모양이고 미국에서 같은 영화를 출시한 Severin Films보다는 대처가 훨씬 나았으므로 넘어가겠습니다. [엑스트로]의 경우 우선 [악마의 밤]과 마찬가지로 본편을 네 버전으로 수록한 집요함이 돋보이며, Necleus Films에서 제작한 인터뷰들의 구성도 매우 훌륭합니다. 여러 관련인의 인터뷰를 교차하거나 적절한 본편 영상을 삽입하는 등 성실한 편집 덕분에 한 시간에 육박하는 메이킹 필름을 앉은 자리에서 단숨에 보게 됩니다. 틈만 나면 '내가 대체 왜 그랬는지 몰라요.'라며 자책하는 해리 브롬리-대븐포트의 솔직함도 유쾌하고, 암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주연 배우 필립 세이어에게 퀸의 브라이언 메이가 곡을 써서 헌정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는 정도로도 모자라서("Just One Life") [엑스트로] 속 장면을 이용해 뮤직비디오까지 만들어 넣은 대목에서는 두 손 들었습니다.

 Second Sight는 2019년에 태풍의 핵으로 떠오를 전망입니다. 제작자 리처드 P. 루빈스타인이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하는 바람에 아무도 손대지 못하고 있었던 조지 A. 로메로의 [마틴(Martin, 1978)]과 [시체들의 새벽(Dawn of the Dead, 1978)]을 Second Sight에서 출시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아직 자세한 정보는 나오지 않았고 복원이 진행 중인 모양입니다만, 지금까지 나온 정보만으로도 가슴을 들뜨게 하기에는 충분합니다. [마틴]은 듀프 네거티브 필름을(제작비를 절감하기 위해 처음부터 네거티브 필름이 아니라 16mm 포지티브 필름으로 촬영한 영화입니다), [시체들의 새벽]은 오리지널 카메라 네거티브 필름을 4K 스캔해서 촬영감독 마이클 고닉의 감수 하에 복원 중입니다. 로마의 백라이트 디지털 HD 현상소에서 복원에 참여한 이탈리아 촬영감독 미켈레 데 안젤리스(어떤 관련이 있어서 참여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가 지난 1월 25일에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고닉에게서 받은 감수 내용 일부를 공개했는데, [서스피리아(Suspiria, 1977)] Synapse판 복원을 감수했던 촬영감독 루치아노 토볼리와 마찬가지로 고닉 역시 쇼트 단위로 꼼꼼하게 코멘트를 했더군요. 복원 업체에서 먼저 알아서 해놓으면 대충 훑어보고 '응, 괜찮네.' 하며 승인 도장 박고 끝내는 수준의 감수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시체들의 새벽]은 감독판, 미국 극장판, 칸 영화제 출품판, 다리오 아르젠토가 재편집한 이탈리아 극장판을 모두 수록할 예정이며 Blu-ray뿐만 아니라 4K Blu-ray로도 출시한다고 합니다. Second Sight는 영국 내 VOD 및 Blu-ray 출시 라이센스만 획득했다고 밝혀 아직 코드 프리의 짜릿한 세계로 건너오지 못한 미국인들이 벌벌 떠는 가운데, Second Sight가 과연 홈비디오 역사에 길이 남을 타이틀을 만들 것인가 귀추가 주목되고 있습니다. 늦여름 개봉박두!







 그밖에.

 Vinegar Syndrome을 칭찬하면서 Vinegar Syndrome답지 않은 영화만을 꼽았다는 점은 마음에 걸립니다. [격분]이 워낙에 재미있는 영화라서 그렇고, 또 블랙 프라이데이 할인 행사 때 주문한 타이틀들이 12월 말에 도착하는 통에 해를 넘기고서야 본 작품이 더 많기 때문일 뿐, Vinegar Syndrome스러운 영화도 좋아함을 밝혀 둡니다. 2018년의 커버 디자인은 필리핀-미국 합작 액션 영화 [원더우먼들(Wonder Women, 1973)]에 주고 싶군요. 순전히 커버 디자인 때문에 관심이 생겼는데, 그림도 근사하고 다른 Vinegar Syndrome 타이틀과는 달리 유광으로 만든 슬립 커버의 질감도 흡족했습니다. 제임스 본드 유의 헐렁한 스파이 모험담에다 [벌 여자들의 침공(Invasion of the Bee Girls, 1973)]을 떠올리게 하는 허무맹랑한 SF/공포 설정─[데몰리션 맨(Demolition Man, 1993)]보다 20년 앞서서 정신 섹스를 묘사한다는 사실!─을 뒤섞은 영화 자체도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고요. Vinegar Syndrome 타이틀에 익숙한 감상자라면 오프닝 크레딧 음악에 탄성이 절로 나올 것입니다.

 Warner Archive Collection 타이틀을 하나도 꼽지 않았군요. [건 크레이지(Gun Crazy, 1950)], [다른 동네에서 보낸 두 주], [도시가 잠든 사이에(While the City Sleeps, 1956)], [이유 없는 의심(Beyond a Reasonable Doubt, 1956)]이 처음 보는 영화였더라면 틀림없이 들어갔겠죠. 하지만 다들 이미 DVD로 보고 좋아할 만큼 좋아한 영화들이라 게으른 영어 자막 정책이 눈에 거슬릴 따름이었습니다. [산에서 돌아오다(Home from the Hill, 1960)][대망의 수요일(Big Wednesday, 1978)]은 원래 후보에 있었는데 한 끗 차이로 뺐습니다. [산에서 돌아오다]는 글까지 다 썼다가 뺐어요. [다른 동네에서 두 주]와 같은 해에 출시됐는데 그걸 빼고 이걸 넣기가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망의 수요일]은 존 밀리어스 영화치고는 허풍이 부족하고 현실에 더 가까이 있어서 마냥 흥분하기에는 불편한 구석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 시퀀스만큼은 밀리어스가 연출한 모든 영화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시퀀스였습니다. [하퍼(Harper, 1966)][마의 풀(The Drowning Pool, 1975)]도 재미있게 보았습니다. [하퍼]는 준수한 레이먼드 챈들러 영화더군요. 로스 맥도널드 소설 원작이지만 폴 뉴먼이 연기한 주인공 하퍼는 루 아처가 되기에는 나르시시즘이 묻어나서 레이먼드 챈들러 영화에 더 가까워요. 다만 영화 애호가로서의 저는 흠 잡을 곳 없는 하드보일드 탐정물인 [하퍼]보다는 조금 덜컹거리고 야비하고 터무니없는 구석이 있는 [마의 풀]에 더 끌렸습니다. 어쨌거나 보려면 둘 다 보는 게 좋겠지만요.

 Studio Canal UK도 좋아하는 출시사인데 좀처럼 거론할 기회가 나지 않네요. 몇 해 지나서 구매하는 타이틀이 많아서 그런 듯합니다. 그래도 2018년에 출시한 해머 영화 중 [지킬 박사와 하이드 누님(Dr. Jekyll and Sister Hyde, 1971)]과 [악마에게 딸을(To the Devil a Daughter, 1976)]은 넣을 만했고, [악마에게 딸을]은 글까지 썼는데, 제가 늘 해머 영화에 관해서 하는 말을 또 하고 있어서 지겨워서 결국 뺐습니다. 존 카펜터의 뛰어난 SF 액션 영화 [그들이 살고 있다] 4K 복원판도 무척 반가웠으나 [누군가 날 보고 있어!]가 이미 한 자리를 차지했으니 카펜터 영화는 됐다 싶었고요.

 Arrow Films 타이틀은 너무 많이 빠졌죠. 다 넣으려면 한도 끝도 없는 출시사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또 돌아보면 가치에 비해 주목받지 못하는 것 같은 타이틀이 많아서 꼽지 않은 게 미안하기도 합니다. The Bloodthirsty Trilogy는 해머 공포 영화를 일본에서 재해석했다는 식으로 언급되던데, 저는 해머 공포 영화보다는 로저 코먼 공포 영화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 다 60년대를 대표하는 고딕 공포 영화 시리즈이지만 이 경우에는 차이를 따지는 게 더 유익하다고 보고요. A Pistol for Ringo & The Return of Ringo: Two Films by Duccio Tessari는 깜짝 놀랄 만큼 준수한 이탈리아 서부극 모음이었습니다. 이탈리아 서부극 특유의 헐렁함과 과격함을 내세우기보다는─그런 걸 찾으신다면 The Sartana Collection이 답입니다─미국 서부극에 가까운 매끄러운 매무새가 돋보입니다. 두 번째 영화 [링고의 귀환(Il ritorno di Ringo, 1965)]이 끝내주지만 첫 번째 영화 [링고에게 권총을(Una Pistola per Ringo, 1965)]도 상쾌한 모험극입니다. 그리고 스즈키 세이준 초기작 박스 세트 중에서는 무국적 장르 영화를 수록한 두 번째 박스가 더 인기일 테지만 청춘 영화를 모은 첫 번째 박스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고 싶군요. 아, [아홉 꼬리 고양이(Il gatto a nove code, 1971)]! 다리오 아르젠토 영화라서 잘 팔리기는 한 모양인데 출시 직후 이후로는 언급이 없는 것 같아요. 하지만 아르젠토가 만든 지알로 중에서 가장 균형이 잘 잡힌 작품 아닌가요. 아르젠토에게는 균형 따위 원하지 않는다는 심정도 이해는 합니다만. 그리고 제 기준으로는 The Éric Rohmer Collection도 입후보 할 수 있었으나 1년 가까이 묵혀 뒀다가 최근에야 보기 시작해서 탈락했습니다.

 Powerhouse Films / Indicator는 여전히 대서양 양쪽에서 군침 흘릴 만한 유명한 영화들을 내놓고 있습니다. [찰리 배릭(Charley Varrick, 1973)], [블루칼라(Blue Collar, 1978)], [국경(The Border, 1982)]를 한꺼번에 내놓은 1월은 대단했죠. 버드 뵈티커, 새뮤얼 풀러 박스 세트야 말할 것도 없고요. 그런데 그 사이사이에 스며 있는 영국 영화 및 희곡 각색물 취향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제2의 Arrow Films인 줄로만 알았더니 제2의 BFI에 가까웠달까. Indicator 전작주의를 꿈꾸던 사람들도 [검슈(Gumshoe, 1971)] 같은 영화를 보고 나서는 난색을 표하며 전작주의를 철회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저는 이런 개성 마음에 듭니다. 그게 아니었으면 [아스픽에 든 멋쟁이(A Dandy in Aspic, 1968)] 같은 영화의 Blu-ray 출시는 꿈도 못 꿨겠죠.

 Lionsgate의 Vestron Video Collector's Series에서 출시한 타이틀 중에는 [문(The Gate, 1987)]이나 [백사의 굴(The Lair of the White Worm, 1988)]만큼 방방 뛰고 싶어지는 영화는 없었습니다. [고딕(Gothic, 1986)]은 최근에야 손에 넣어 아직 보지 못했기에 판단 보류지만요. 그래도 [폭력교실 1999(Class of 1999, 1990)]도, [데이곤(Dagon, 2001)]도, [시체소생자를 넘어서(Beyond Re-Animator, 2003)]도, 그리고, 으음…… 휴, [맥시멈 오버드라이브(Maximum Overdrive, 1986)]도…… 불량식품 같은 맛은 있었습니다. [폭력교실 1999]를 순위에 넣으려다 말았고요. 새 필름 스캔 & 복원은 절대로 하지 않고 항상 기존 마스터 대충 닦아서 내는 Vestron Video Collector's Series의 태도는 괘씸하지만 애초에 라이언스게이트가 그런 회사니까 별수 있겠습니까. 그따위로 할 거면 차라리 출시하질 말라고 큰소리치기에는 라이언스게이트에서 소유한 탐나는 영화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나마 부록이라도 새로 만들어서 Blu-ray로 내주는 게 어디냐고 굽실거릴 수밖에 없는 수집가의 슬픔이란.







 Twilight Time이라는 이름은 지금이 영화 광학 디스크 시대의 황혼기라는, 닉 레드먼의 다소 자조적인 농담에서 비롯했습니다. Twilight Time가 설립된 지 8년째인 지금까지도 물리 매체 시장이 끝났거나 적어도 위기에 처해 있다는 이야기는 매년 나오고 있지요. 그런가 하면 반대로 물리 매체의 필요를 역설하면서 지금이야말로 수집가들에게는 천국과도 같은 시대라는 기사도 매년 읽게 됩니다. 저는 그 두 관점이 동일한 상황을 두고 관점만 달리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여러 중소 출시사들이 앞다투어 빼어난 타이틀을 내놓아 수집가들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활황기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그 시장은 꽤 오래 살아남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는 업계인이 아니니 구체적인 숫자를 알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보아하니 이 수집가용 한정판 중심 시장은 3천 장 규모만 잘 소화하더라도 웬만큼 유지되는 모양이군요. 심지어 최근에는 1천 장, 혹은 5백 장 한정판도 나오고 있어요. 그 숫자를 '이 타이틀은 시장성이 현저히 낫다는 얘기군'이라고 비관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저 정도만 팔아도 수익이 나나 보군'이라는 낙관적인 해석도 가능합니다. 당장 손해를 보더라도 5백 장, 1천 장 한정판을 미끼로 내걸어 분위기를 띄운 후 더 저렴한 일반판을 많이 팔아 적자를 메우겠다는 식으로 장사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닐 테니까요. 한국에서라면 3천 장은 꿈과 같은 숫자일 테지만 영미권에서라면 그 정도 규모는 제법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물리 매체는 중요하며, 아직도 건재하다!'라는 식의 티없이 희망찬 주장을 볼 때면 머리를 긁적이게 됩니다. WIRED에서는 지난 12월 필름스트럭의 종말과 블랙프라이데이 시즌의 여운 속에서 "Streaming Isn't Eveything, and Blu-rays Are Back to Prove It"이라는 기사를 올렸습니다. 물리 매체 수집가들은 이 기사를 퍼다 나르며 '이것 보라고! 우린 쌩쌩해!'라고 외쳤고요. 하지만 제게는 이 기사가 본의 아니게 Blu-ray 수집가들의 소수자성을 환기하는 것처럼 읽히더군요. 기사의 첫 문단을 보세요.

지난달 말, 대다수의 블랙프라이데이 구매자들이 고화질 텔레비전이나 새 컴퓨터 할인 행사를 검색하는 동안, 잭 킬브루는 잉마르 베리만을 검색하고 있었다. 스물네 살의 소프트웨어 개발자 킬브루는 Boutique Blu-ray 서브레딧의 창설자이자 모더레이터로, 이 서브레딧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고급 (그리고 종종 값비싼) 영화 타이틀의 열성 수집가들이다. 이 팬들은 최근 획득한 Blu-ray의 사진을 찍어서 올리고, 불어나는 컬렉션을 기록하고, [미치광이(Maniac, 1980)] 같은 유명하지 않은 80년대 공포 영화에서부터 디스크 서른 장짜리 Ingmar Bergman's Cinema에 이르기까지 새 "부티크" 출시작에 관한 정보를 열정적으로 업데이트한다.

 어째 어조가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 같지 않습니까?

 지금처럼 소량 + 고급화 + 한정판 정책을 펴는 중소 출시사들의 입지가 확대된 것은 단지 그들이 영화 애호가와 수집가의 마음을 더 잘 헤아리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DVD가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에는 메이저 스튜디오에서 직접 그런 고급 타이틀을 내놓았고, 수량도 훨씬 넉넉했습니다. 조금 기다리면 가격도 어이없을 정도로 떨어졌고요. 그런데 지금은 그 메이저 스튜디오들이 직접 Blu-ray를 제작해 출시하는 일에서는 발을 빼고, 자신들이 소유한 영화의 홈 비디오 배급권을 중소 출시사들에게 임대하고 있습니다. 예전만큼 수지가 맞는 시장이 아니기 때문이겠죠. 중소 출시사들이 타이틀의 품질을 높이는 데에 열을 올리는 까닭은 좁아진 시장 안에 남아 있는 충성도 높은 수집가들의 마음을 빼앗기 위해서이고, 소량 한정판을 내세우는 정책은 '우리 것부터 서둘러 사지 않으면 나중엔 못 사!'의 다른 표현처럼 들립니다.

 중소 출시사들이 제작비를 절감하려는 노력 속에서 작은 퇴보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Criterion은 긴 병풍 형태로 펼치기도 읽기도 쉽게 만들던 속지를 여러 겹으로 접은 한 장짜리 커다란 포스터 형태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유명한 영화가 아니면 부록에 들이는 공이 전만 못하다는 불평도 종종 나옵니다. Arrow FIlms가 일본 영화 타이틀에 들이는 제작비를 줄이기로 하여 더 많은 관련인을 섭외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인터뷰를 따지 못했다고 아쉬워하는 제작자의 목소리를 들은 적도 있습니다. The Masters of Cinema Series의 팬들은 MoC 출시작 수가 줄어들고 임팩트도 약해진 가운데 보다 '상업적'인 Eureka Classics 레이블이 활기를 띠는 상황을 아쉬워하곤 합니다. 한정판이 아닌 저가형 타이틀의 경우 슬리브 커버용 종이 품질을 낮추거나 더 내구성이 낮은 케이스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본편이나 부가 영상에 오류가 생겨 디스크를 교환해야 하는 상황이 출시사를 막론하고 심심찮게 나타나 제품 검수 단계에 들이는 비용이나 시간이 줄어든 게 아니냐는 의심도 나오고 있습니다. 특히 Shout! Factory는 잦은 실수로 인해 이미지가 상당히 나빠졌죠. 무엇보다도 저는 영어 자막 품질의 퇴보를 자주 실감합니다. Warner Archive Collection의 영어 자막에 관한 불평은 여러 차례 늘어놓았지요. WAC의 자막 품질이 그렇게 하락한 데에는 원래는 직접 맡았던 자막 제작을 여러 개의 외부 업체에 맡기면서 일정한 원칙조차 제시하지 않은 탓이 큰 듯합니다. 한때 자막 가독성이 가장 좋다고 생각했던 Eureka는 해상도가 떨어지거나 글자 크기가 평소보다 훨씬 작거나 무분별한 세 줄짜리 자막을 띄우는 추태를 심심찮게 보입니다. [큐어(Cure, 1997)]처럼 많은 이들이 기다렸던 영화를 선보이면서도 DVD 자막을 그대로 이용해 DVD 때도 누락됐던 자막이 Blu-ray에서도 누락됐다는 지적도 들었습니다(그러고 보니 이 타이틀은 소책자 인쇄 오류가 있어서 교환 프로그램도 진행했지요). 애초에 자막 품질에 관해 별로 기대하지 않았던 Kino Lorber조차, 처음 영어 자막을 넣기 시작했던 시절과 비교하면 글자체나 크기, 위치, 싱크 등에 더욱 무관심해졌습니다. 수집가나 신경 쓸 자잘한 문제인가요? 그럴지도요. 하지만 적어도 여러 출시사들이 격렬하게 (영어식으로 말하자면) "귀퉁이를 깎아내고" 있다는 추측의 근거는 될 듯합니다. 슬립 케이스나 심지어 소책자를 초판에만 제공하는 것도 한편으로는 판매를 촉진하기 위함일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작비 절감을 위한 방책일 테지요.

 중소 출시사들은 생산과 유통에서도 종종 어려움을 겪곤 합니다. 지난해 미국에서는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디스크 제조 공장이 문을 닫았습니다. 현재는 멕시코 과달라하라에 있는 단 하나의 공장이 북미 시장 전체를 책임진다고 해요. 이 때문에 각 출시사들의 2018년 하반기 출시 일정에 줄줄이 차질이 생겼고, 아직도 여파에서 완전히 회복하지는 못한 모습입니다. 세트 하나에 디스크 30장이 들어가는 Ingmar Bergman's Cinema 박스 세트는 출시 직후 열화와 같은 인기 속에 품절된 뒤 세 달 동안 새 물량이 입고 되지 않았습니다. 영국에서는 홈 비디오 타이틀 판매처가 줄어들면서 신규 타이틀의 가격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영국 전역의 오프라인 매장과 온라인 쇼핑몰을 통해 꾸준히 할인 행사를 하고 신규 타이틀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해 오던 HMV가 연말에 관리 처분에 들어갔지요. 그 즈음부터 아마존 영국에서는 Powerhouse Films / Indicator, Arrow Films, BFI, Second Run 등 중소 출시사의 신규 타이틀 가격을 전보다 높게 책정했습니다. Zavvi나 Base를 대안으로 삼기에는 부족한 부분이 많고, 새로 인수된 HMV의 운영 방침은 아직 확실치 않습니다. 덕분에 영국 타이틀을 즐겨 구매하던 수집가들은 소비 위축을 호소하면서 이런 변화가 출시사들에게도 좋지 않을 거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후자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제 영국 타이틀 구매가 현저히 줄어든 것은 사실입니다. Powerhouse Films가 출시 예정작들을 묶어 구매하면 가격을 할인해 주고 포장 품질도 개선하는 등 직접 운영하는 온라인 쇼핑몰 이용을 장려하게 된 것도 이런 시장 변화와도 무관하지 않을 듯합니다.

 한편 메이저 스튜디오는 갈수록 디스크 시장에서 발을 빼고 있습니다. 여전히 DVD와 Blu-ray와 4K Blu-ray를 출시하고는 있습니다. Batman: The Complete Animated Series처럼 대박을 치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는 초대형 타이틀도 드문드문 나오고, 마블과 DC의 주력 블록버스터들은 아마 으리으리하게 여러 가지 버전으로 나오고 있을 테고요. 하지만 팬과 제작 규모가 그보다 작은 영화들의 사정은 그리 밝지 않습니다. 대다수 타이틀이 구색을 맞추는 시늉만 하고 있습니다. 이 방면에서는 Lionsgate가 전통의 강자이고, Universal의 활약도 눈부십니다. 원래 메이저 스튜디오의 최신 개봉작 부록은 웹상에 선공개 되는 홍보 영상이 중심인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불복종(Disobedience, 2017)]이나 [업그레이드(Upgrade, 2018)]는 물론이고 연말연시 평론가 리스트에 꽤나 오르내렸던 [블랙클랜스맨(BlacKkKlansman, 2018)] 같은 영화도 5분짜리 부가 영상 두 개로 때우는 결단력은 칼 같습니다. 심지어 그토록 팬층이 두터운 [할로윈(Halloween, 2018)]도 다르지 않은 형편입니다. 그런 판국이니 업계의 찬사를 한몸에 받은 '외국어 영화' [복수]가 수준 이하의 영어 자막과 예고편만 달린 채 출시된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동시대 개봉작이 아니라면 메이저 스튜디오의 관심은 더욱 줄어듭니다. 중소 출시사에서 선보일 만한 복원작을 메이저 스튜디오가 다루면 어떻게 되는가. Sony는 요 몇 달 간 주문제작형 Blu-ray 출시에 다시 박차를 가하며 좋은 인상을 남기고 있었습니다만, 2월 12일에 출시한 [아무도 벗어나지 못하리라(None Shall Escape, 1944)] Blu-ray 소식은 우울했습니다. 앙드레 드 토스 감독이 1943년에 연출한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의 향방이 불투명하던 시절에 이미 홀로코스트와 전범 재판을 다룬 선구적인 작품으로, 소니에서 직접 복원해서 2018년 TCM 고전영화제를 통해 처음 공개했습니다. 당시 상영에는 이 영화에 출연했고 현재 101세로 생존해 있는 배우 마샤 헌트가 참석해서 에디 멀러와 인터뷰도 나누었지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해놓고도 막상 Blu-ray에는 아무런 부록도 없을 뿐만 아니라 영어 자막도 없고, 메뉴 화면조차 없다고 합니다. 메뉴 화면도요. 하기야 부록도 없고 자막도 없는데 메뉴 화면은 만들어 무얼 하겠습니까마는, 그래도 Warner Archive Collection가 가장 불성실했을 때도 그렇게까지는 안 했어요. 정말 안 해도 되는 건 다 안 하겠다는 굳은 결심이 느껴지는 사건이었습니다. (소니 영화니까 제발 Powerhouse Films에서 가져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메이저 스튜디오를 이야기할 때 넷플릭스도 빼놓을 수도 없겠지요. 넷플릭스의 물리 매체 무출시 정책은 잠재 관객을 스트리밍 서비스로 유도하기 위함일까요? 그렇게만 보기에는 넷플릭스는 이미 업계의 초거대 메이저요, 일상적인 문화로 자리 잡지 않았습니까? 자체 제작 시리즈나 장편 극영화를 물리 매체로 출시하지 않는 넷플릭스의 태도는 적극적인 거부라기보다는 차라리 무관심에 가까워 보입니다. 하기야 사람들이 '나는 Blu-ray가 나오기 전에는 보지 않겠어!'라며 [버드 박스(Bird Box, 2018)] 시청 거부 운동에 나서는 것도 아닌걸요. 정성 들여 물리 매체를 내놓으면 살 사람들이야 사겠지요. 하지만 넷플릭스 입장에서 생각해 보면, 이미 몇천만 명이 보았고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는 영화를 몇천 장, 운 좋으면 몇만 장 단위의 시장에 조금 더 팔기 위해 새삼스럽게 물리 매체 제작에 필요한 품을 들이고 새로 여러 업체와 계약하고 품질 및 재고 관리까지 한다는 건 그렇게 매력적인 사업은 아닐 듯합니다. 그리고 이건 넷플릭스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아마존 스튜디오 수장 제니퍼 솔키의 버라이어티 인터뷰에 따르면 아마존도 넷플릭스 같은 변화를 꾀하는 모양입니다. 앞으로 아마존은 자체 제작 영화를 극장 배급 없이 아마존 프라임으로만 독점 공개할 계획이라는군요. 아마존에서 배급권을 사 들인 영화도, 지금까지는 극장 개봉일과 아마존 프라임 사이에 90일의 유예 기간을 두었으나 앞으로는 이 유예 기간을 줄일 거라는 소식은 덤입니다.

 하지만 당장 물리 매체 수집가들에게 가장 심란한 소식을 안겨준 메이저 스튜디오는 20세기폭스였습니다. 폭스는 조만간 있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주연상, 남우조연상, 각색상 후보에 올랐고 이미 여러 연말연시 시상식을 통해 인지도가 높아진 멜리사 맥카시 주연의 [나를 용서할 수 있나요?(Can You Ever Forgive Me?, 2018)]의 Blu-ray 출시 계획을 취소하고 DVD만 출시하기로 했습니다. 아카데미 열 개 부문에 후보로 오른 [총희(The Favourite, 2018)]는 Blu-ray는 출시하되 4K 소스는 iTunes로만 배급하기로 했고요. 상황이 이럴진대 이보다 인지도가 더 낮은 영화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주류 영미권 연말연시 베스트 목록의 단골 후보들조차 Blu-ray 출시가 당연하지 않은 시대가 이미 왔습니다. 몇 년 기다리면 이런 작품들도 다시 중소 출시사들이 라이센스를 취득해서 한정판으로 출시할까요? 그렇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어쨌든 '아무리 시장이 예전만 못하더라도 이 정도로 유명한 영화는 Blu-ray로 나올 수밖에 없다'는 믿음은 이제 북미에서도 흔들리고 있습니다.

 음울한 사실과 소문과 추측을 이렇게 나열한 것은 비관론을 펴기 위함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결산 글은 아직도 세상에 이렇게 열심히 물리 매체를 사고 보는 인간이 있다는 선언에 해당하겠지요. 다만 열성적인 수집가들이 때때로 자부심에 취해 "Blu-ray 짱!"만을 외치는 모습을 보아 온 터라, 그런 열광을 조금은 경계하고 싶었습니다. 이렇게 정리하고 싶습니다. 열혈 수집가들이 옹기종기 모여 사는 작은 세상에서, Blu-ray는 여전히 황금기를 누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더 넓은 세상에서 볼 때, Blu-ray는 황혼기에 들어선 지 오래입니다. 닉 레드먼의 비유를 조금 더 확장하자면, 황혼은 이미 한참 전에 시작되었고 이미 많은 이들이 캄캄한 밤으로 접어들었습니다. 그렇지만 황혼빛을 남들보다 훨씬 오랫동안 즐기는 사람들이 아직도 꽤 남아있는 거지요.

 (사실 저는 "물리 매체 시장의 미래" 같은 소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전문적인 자료나 식견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 논의는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분야랴도 일단 무슨 말이든 꺼내고 보는 호사가들의 부정확한 탁상공론으로 빠지기 쉬워서요. 결국 이 글도 마찬가지일 테니, 이런 소리는 이걸 마지막으로 하렵니다. 훨씬 더 전문적인 경험과 수치를 바탕으로 한 견해를 원하신다면 The Digital Bits의 편집장 빌 헌트가 최근에 쓴 두 개의 칼럼, "CES 2019: The Beginning of the End for Physical Media""Thoughts on the Future of Physical Media"를 권합니다.)







 다시 유익한 이야기로 돌아갈까요. 2018년 한 해 동안 제게 가장 큰 즐거움을 안겨 준 출시사는 다름 아닌 Warner Bros. / Warner Archive Collection이었습니다. 사정은 이렇습니다─

 지난 11월 Filmstruck이 갑자기 운영을 중단하자 물리 매체 예찬론자들은 그것 보라는 듯 스트리밍 서비스가 약속하는 "소장"의 불안정성을 비판하면서 물리 매체의 반영구성을 찬양했습니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돈을 주고 영화를 "구매"하더라도 서비스 제공자가 컨텐트 제공을 중단하는 즉시 소유권을 잃지만, 디스크를 소유하고 있으면 안심이라면서요. 하지만 물리 매체에도 수명은 있습니다. 오랫동안 여러 포맷의 홈 비디오 매체를 수집해 온 애호가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애지중지했던 소장품이 노화를 겪다 어느 순간 품에서 떠나가는 경험을 해 보았을 거예요. 처음 광학 디스크가 자기 테이프의 지위를 계승할 때만 해도 이론상 반영구적이라고들 했지만, 실제로는 취급 부주의로 인해 "기스" 난 디스크가 재생을 멈추거나 구운 디스크가 "뻑 나는" 일이 그리 드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처음에는 멀쩡했던 디스크가 별다른 외부 충격이 없었는데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불량을 일으키기도 합니다. 제작 공정에 결함이 있었지만 처음에는 문제가 나타나지 않다 뒤늦게 데이터가 망가지거나, 잘못된 보관 환경으로 인해 물리적인 손상이 누적되는 거죠.

 한국에서도 갈변 현상(bronzing) 때문에 수집가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난 적이 있고, 외국이라고 예외는 아닙니다. 이름난 Criterion조차 이런 오류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사실 오히려 영미권 Blu-ray 출시사 중에는 가장 이런 문제로 유명하지 않나 싶어요. 저도 지난해에 [역마차(Stagecoach, 1939)] Blu-ray에 든 부록을 보다가 갑자기 디스크가 버벅거리다 정지하는 바람에 눈물을 머금고 새 디스크를 샀습니다(문제가 있는 디스크를 보내면 새것으로 교환해 주겠다는 답변은 받았는데, 배송비가 자비 부담이라서 차라리 할인 행사를 기다려 하나 새로 사기로 했습니다). 그전에는 다른 사람이 소장한 [워커바웃(Walkabout, 1971)] Blu-ray가 똑같은 일을 겪는 걸 목격했고요.

 하지만 이 방면의 끝판왕은 Warner Bros.입니다. WB에서 2006~2008년 사이에 생산한 DVD는 공정상의 문제로 시간이 지나면 무작위로 오류를 일으키는 것으로 악명이 높습니다. DVD가 출시되고 한참 후에야 이 문제가 조금씩 발견된 데다 대상이 되는 타이틀의 수가 너무 많다 보니 손쓸 방법이 없습니다. 틀림없이 WB의 잘못이기는 한데, 그렇다고 보상책을 마련하지 않는 것을 탓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어떤 분야를 막론하고 2007년에 구매한 제품이 10년이 지나서 작동이 안 되니 바꿔달라고 하는 건 난감한 일일 테죠. 해당 제품이 절판된 지 오래라면 더 그럴 테고. 그런데 하필 이 시기는 WB DVD의 전성기와 겹칩니다. 고전기 할리우드 영화 애호가인 제게 이 무렵의 WB는 세상에서 가장 고마운 출시사였죠. 그래서 아직도 제게는 이때 나온 타이틀이 잔뜩 있습니다. 어쩌다 운 나쁘게 불량 디스크를 발견하게 되면 이를 갈면서 새로 사서 교체하기는 해도, 소장한 WB DVD 전체를 검수할 엄두는 나지 않더군요. 검수해 봐야 그 뒤에 오류가 생길 수도 있는 거고.

 작년 어느 날, 문득 제임스 캐그니가 보고 싶어진 저는 Warner Gangsters Collection Vol. 3 수록작 중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레이디 킬러(Lady Killer, 1933)]를 골랐습니다. 영화관 검표원으로 등장한 제임스 캐그니가 두 번째 장면 만에 해고당한 뒤 우연히 사기 도박단에게 걸려들어 돈을 탈탈 털릴 뻔하다가 기지를 발휘해 오히려 이 패거리의 두목이 되고 사업이 번창한 끝에 나이트클럽을 차려 클럽에 찾아오는 돈 많은 손님들의 집을 터는 절도단으로 변신했다가 살인 사건에 휘말리는 바람에 경찰이 찾아오자 동료들과 헤어져 로스앤젤레스로 달아났는데 그곳에서 얼결에 할리우드 영화에 엑스트라로 캐스팅 되는 바람에 영화계에 발을 들이게 되고 급기야 당대를 대표하는 스타로까지 거듭나 마침내 새 삶을 사는구나 싶던 중에 이 소식을 들은 옛 동료들이 찾아와 그를 협박해서 할리우드 스타들의 집을 털려 한다는 이야기를 76분 만에 해치우는 영화입니다. 아, 30년대 초 할리우드의 무자비한 경쾌함이란. 이런 영화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작정 만나면 머리가 핑핑 돕니다. 그런데 영화가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제임스 캐그니가 자동차를 타고 옛 동료들을 추격하려 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디스크가 멈추는 겁니다. 장난해?!

 그래도 거기까지는 이미 여러 번 겪어 본 일이었습니다(클라이맥스에서 디스크가 멈추는 극적인 경험은 처음이었지만요). 마음을 가라앉히고 [레이디 킬러] DVD를 새로 사서 교체할 수 있는지 알아본 다음, 영화를 보다만 찜찜함을 다른 영화로 달래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됐으니 다른 갱스터 영화, 이번에는 에드워드 G. 로빈슨 주연작으로. 그래서 Warner Gangsters Collection Vol. 2의 [사소한 살인 사건(A Slight Case of Murder, 1938)]을 골랐는데…… 이건 아예 디스크 재생 불능! 두 번 연속 디스크 불량 당첨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꼭지가 돌더라고요. 바로 그 순간 결심했습니다. 안 되겠다. 내게 있는 WB DVD를 전부 검수하고 멀쩡한 디스크도 파일로 추출해 두자.

 시간은 오래 걸려도 많은 조작이 필요한 일은 아니어서 데스크탑을 쓸 때마다 짬짬이 디스크를 하나씩 검수하고 추출했습니다. 각오했던 것만큼은 아니었지만 역시 피해를 입은 타이틀은 더 있었습니다. Forbidden Hollywood Collection Volume Two 수록작 다섯 편 중 네 편이, 그리고 Film Noir Classic Collection Vol. 4 수록작 열 편 중 여덟 편이 재생 불능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는 억장이 무너지더군요.

 하지만 그게 꼭 괴로운 일만은 아니었습니다. 제게 있는 모든 WB 타이틀을 꺼내고 만져 보는 동안 자연스럽게 한동안 보지 않았던 영화들에 새삼 눈길을 주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본 건 확실한데 구체적인 줄거리나 장면 하나 잘 떠오르지 않는 영화들. 햇수를 따져 보니 어느덧 10년 넘게 다시 보지 않은 영화들. 틀림없이 굉장히 좋아했는데도 막상 한 번밖에 보지 않은 영화들. 그리고 한 번도 보지 않은 영화들. 너무 오랫동안 진열장에 있었기에 어느덧 배경으로 변해버린 무수한 DVD 속에서 (다시) 만난 영화들이 어찌나 반갑고 새롭던지. 박스 세트 속의 한 작품으로 조용히 출시되어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 채 묻힌 영화들을 발견하고 연결하는 기쁨은 타이틀마다 화려한 소개와 방대한 부록, 열띤 리뷰가 따라 붙는 요즘의 분위기에서는 맛보기 어려운 것입니다. 특히 공장 노동자인 주인공 험프리 보가트가 이민계 노동자 때문에 진급에서 밀렸다고 앙심을 품고 지역 KKK에 가입하는 Warner Gangsters Collection Vol. 3 수록작 [검은 군단(Black Legion (1937)]을 보고 얼이 빠졌는데, 얼마 후 진저 로저스가 주연을 맡은 필름 누아르라는 것만 알고 샀던 [폭풍 경보(Storm Warning, 1950)]가 마찬가지로 KKK에 관한 이야기일 뿐만 아니라 [검은 군단]이 다루지 않은 부분을 보완하며 화답하는 영화임을 확인하며 느낀 희열은 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즐거움은 이미 소장한 DVD를 재발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오류가 발생한 디스크들 덕분에 Warner Archive Collection에서 출시 중인 DVD에도 전보다 더 관심을 두게 되었지요. WAC에서 출시하는 DVD 라이브러리의 방대함이야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애초에 WB에서 WAC라는 하위 레이블을 따로 만든 까닭은 자사의 방대한 카탈로그 가운데 공들여 복원해서 부록까지 붙여 가며 DVD로 정식 출시하기는 어려운 영화들을 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DVD-R로 구워서 제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WAC DVD 중에는 정말 듣도 보도 못한 희귀작들이 많아요. 다만 애초에 취지가 그러했기에 WAC DVD들은 화질이나 음질이 좋지 않은 경우도 있고, 부록은 전무하며, 영어 자막도 없습니다. 그놈의 자막 부재만 아니었더라도 지금쯤 WAC의 노예가 되어 있었을 텐데. 정말 보고 싶은 영화들은 자막이 없어도 종종 사서 보기는 합니다만,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볼 수 없는 등 활용도가 낮다 보니 손이 잘 안 가는 게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류가 발생한 디스크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한때 WB에서 직접 영어 자막을 달아 출시했다가 절판된 이후 다시 WAC를 통해 DVD-R로 나온 타이틀은 디스크 내용이 WB판과 완전히 똑같다는 걸 확인하게 됐습니다. 메뉴 화면도, 본편 품질도, 부록도, 그리고 자막도요. 그때부터 저는 오류가 난 디스크를 WAC DVD로 교체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예전에 사지 못하고 지나쳤는데 그사이 절판돼서 중고로 살까 말까 손가락만 빨고 있던 영화들도 WAC DVD로 사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빈센트 미넬리가 연출하고 주디 갈랜드가 주연을 맡은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 1995)] 풍 로맨스 [시계(The Clock, 1945)] 같은 영화는 WAC의 미넬리 편애를 고려하면 Blu-ray 업그레이드를 기다리는 게 현명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미 그 영화를 보지 못한 채 살아온 세월이 너무 길었기에 도저히 참을 수 없었고, 당장 내일 Blu-ray 출시 소식이 들리더라도 DVD로 먼저 본 것을 전혀 후회하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이렇게 십수 년 전에 나온 WB DVD들을 적극적으로 찾다 보니 더 나아가 비슷한 시기에 다른 출시사에서 나온 DVD들도 자연스럽게 챙기게 되었습니다. 이미 Blu-ray로 업그레이드된 영화들도 많지만, 그렇지 않은 영화도 많으니까요. 간절히 보고 싶은 영화의 Blu-ray 업그레이드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면 몇 달러쯤 주고 DVD를 사서 보는 것쯤은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솔직히 몇십 달러를 주고서라도 구해 보고 싶은 DVD도 있는걸요(빌어먹을 파라마운트!).

 마찬가지로 출시된 지 오래된 Blu-ray들이 준 기쁨도 결코 작지 않았습니다. "X월에 권해 보고 싶었던 타이틀" 기획을 계속했더라면 이런 이야기는 굳이 꺼낼 필요조차 없었겠지만요. 통념과는 달리 처음에는 좋아하기 어려웠던 알프레드 히치콕은 이제는 매년 더 좋아지기만 하는데, 오래전 DVD로 한 번 보았을 뿐 Blu-ray로는 처음 본 두 편의 가톨릭 영화 [나는 고백한다(I Confess, 1953)][누명 쓴 남자(The Wrong Man, 1956)]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켄 로치의 [남자 친구(The Boy Friend, 1971)]는 [백사의 굴]만큼이나 마음에 들어서 방방 뛰며 서울에 사는 친구에게 충무로뮤지컬영화제 상영을 놓치지 말라고 닦달할 정도였고요. [빅터 빅토리아(Victor Victoria, 1982)]도 타협적인 결말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중반까지는 정말 좋아서 블레이크 에드워즈에 대한 관심을 [S.O.B.(1981)]로 이어 가기에는 충분했습니다. [광신도(Fanatic, 1965)] 이야기를 했던가요? 안 한 것 같군요. Hammer Volume One: Fear Warning! 수록작인 이 작품은 제가 제목을 [미치광이(Maniac, 1963)]와 혼동해서 이미 봤던 영화라고 착각하고 지나쳤는데, 그렇게까지 해머 공포 영화의 진수를 담고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또 다른 영국 영화로 리처드 아텐보로 주연의 섬세한 코미디 [바타시의 포(Guns at Batasi, 1964)] Blu-ray가 거의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던 건 요즘 가뜩이나 사정이 어렵다는 Signal One에게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리고 [프랑켄후커(Frankenhooker, 1990)]. 커버 디자인이 워낙 강렬해서 예전부터 눈길은 갔지만 그냥 저열한 공포 코미디 아닐까 싶어 망설이던 차에 Arrow Films에서 새로 출시한 [바스켓 케이스(Basket Case, 1982)]를 보고 깜짝 놀라서 서둘러 구매해 보았는데, 아, 지금까지 본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여자 피조물을 만드는 영화 중에서는 최고였습니다. 그게 철두철미한 계산에서 나온 영화가 아니라 다음 영화 아이디어 없냐는 제작자의 말에 제목부터 줄거리까지 몽땅 즉석에서 지어낸 결과물이라니, 역시 좋은 영화는 성품에서 나오나 봅니다.

 영화는 스크린에 들러붙지 못하고 유령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기에, 영화의 소비 역시 강한 휘발성을 띠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숙명인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홈 비디오 덕분에 원하는 영화를 언제든 다시 돌려 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하면서도 정작 홈 비디오를 구매하고 소비하는 행태마저 동시대의 유행에만 휘둘리도록 내버려 두는 건 아무래도 좀 민망스럽고 미안하네요. 영화의 소비 속도를 의식적으로 늦추고 동시대 주류 영화계가 권장하는 영역 바깥으로 이탈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하듯, 홈 비디오 소비에도 마찬가지 노력이 필요함을 거듭 되새깁니다.

Posted by Dr. Gogol